2010년 12월 19일 일요일

『동야휘집』에 기술된 박엽朴燁

숙야는 장수로서의 지략이 있어 천문과 지리병학과 술수에 모두 능통하였다젊을 적에는 또래 청년들과 잘 어울려 놀았다하루는 청년들이 어떤 집에 모여 있는데뜰 안에 갑자기 바깥에서 더운 물이 지붕을 넘어 날아 들어와 의관에 쏟아졌다청년들이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필시 박 숙야가 온 게로다." 하고 나가 본 즉엽이 행랑채 바깥 길에 서서 지붕 위로 오줌을 갈기고 있었다.
  엽의 외가가 충청도 목천 고을에 있어 서울과는 이백 리 남짓 떨어져 있었다소매 속에다 밥 한 그릇을 넣고 느지막이 소매를 저으며 길을 떠나면날이 채 저물기도 전에 당도하였다그 길 가는 모습이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아 다른 행인들과 다른 점이 없었으나 다만 바람결에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날 따름이었다
  郡邑 다스림에 미쳐서는 위엄과 명령이 몹시 높아서 관청 일이 그 자리에서 결정되고광해군(李琿, 1575-1641)의 동서로서 관서(평안도)백이 된지 10년에 위엄이 온 도에 떨쳤고북쪽 오랑캐도 또한 그를 두려워하여 감히 국경을 넘어오지 못하였다일찍이 막비(裨將)를 불러 술과 안주를 주면서 말하기를 “너는 이것을 가지고 중화 구현으로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반드시 두 사람의 건장한 사나이가 채찍질하며 말을 타고 지나갈 것이니 내 말로 전하기를 ‘너희들이 우리나라에 왕래하는 것을 아무도 모르는 줄 알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다행역이 참으로 괴롭겠기로 술과 안주를 보내는 것이니 취하게 마시고 속히 돌아가도록 하라 ’고 하라.” 幕客(막비)이 즉시 가서 기다리자 과연 두 사람이 지나므로 엽의 말로 전하니 두 사람이 서로 돌아보면서 실색하여 말하기를 “장군은 신인이로다우리들이 어찌 감히 다시 오리오.” 하고는 술을 마시고 사라지니 이들은 곧 용골대와 마부대로 몰래 우리나라에 잠입하여 허실을 정탐함이었는데 박엽만이 그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또 한 번은 총애하는 기생에게 이르기를, "오늘 밤에 네가 나를 따라가서 좋은 구경거리 하나를 보겠느냐"하니 기생이 쾌히 응낙하였다밤이 되자 엽이 검푸른 노새에 타더니 앞에다 기생을 태우고 주단으로 자기 몸에다 기생의 허리를 묶었다눈을 뜨지 말라고 주의를 주고는 채찍을 휘둘러 쏜살같이 달리니 두 귀에 바람소리만 들릴 뿐이었다한 곳에 이르러 눈을 떠서 보라 하는데서리가 덮인 광막한 큰 들판에 달빛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고군영 막사는 하늘에까지 잇닿아 있었고 등불이 휘황하게 빛났다이에 기생에게 장막 속에 숨어 있으라 하고 엽이 의자에 혼자 꼿꼿이 앉아 있으려니,잠시 후 징 소리가 나면서 몇 리에 걸쳐 철기가 성난 파도처럼 길게 줄을 지어 몰려 왔다대열을 벌이어 진형을 갖추고는 두 패로 갈리어 용력을 과시함이러니 가운데 있는 한 장수는 팔 척이나 되는 키에 머리엔 푸른 깃을 꽂은 붉은 투구를 쓰고 몸엔 용무늬 갑옷과 검은 상의를 입고 있었으며 손에는 별 무늬가 새겨진 보검을 잡고 있었다그 자가 장막을 헤치고 들어오더니 웃으면서 말하기를, "네가 과연 왔구나오늘밤에 먼저 검술을 시험하여 자웅을 가리는 게 좋겠다." 하자 엽이, "좋다."고 응수했다이에 칼을 짚고 의자에서 내려 와 들판 위에 마주 보고 서서는 둘 다 공격하는 자세를 취했다얼마 뒤 두 사람은 한 줄기 흰 무지개로 변하여 구름 덮인 하늘로 솟구쳐 들어갔는데단지 공중에서 서로 칼 부딪는 소리만이 들려 왔으며 가끔 붉은 번갯불이 번쩍이더니마침내 그 장수가 땅에 떨어져 고꾸라지자 엽이 이내 공중에서 날아 내려와 오랑캐 장수의 가슴통에 걸터앉더니, "어떤가하고 소리쳤다그러자 그는, "장군의 신이한 용력을 만 명이라도 당해내지 못할 것을 오늘 더욱 잘 알게 되었소이다.어찌 다시 장군과 우열을 다투겠소."라고 대답했다엽이 웃으며 일어나 같이 장막 안에 들어가 서로 술잔을 들어 권하고선 각자 몇 잔을 취토록 마시고 나더니그 장수는 작별을 고하고 떠났다그러나 일  못 가서 갑자기 대포 소리가 한 방 울리자 포연과 화염이 하늘에까지 뻗치더니 저들 한 부대의 떼 지어 있던 병사와 말들이 운무 속으로 말리어 들어가고 땅 위에 있던 자들도 역시 모조리 풍비박산(바람처럼 날리고 우박처럼 흩어짐)이 되어버렸다아까의 장수가 다시 혼자 말을 달려오더니 돌아가는 길을 열어 주십사고 애걸하자엽은 웃으며 돌아갈 수 있게 허락해 주었다그리고는 기생을 불러 같이 노새를 타고 올 때처럼 돌아왔는데그 때까지도 하늘은 아직 밝지 않음이더라무릇 엽이 싸운 그 장수는 곧 오랑캐 장수인 누루하치였으며그 곳은 곧 그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장소(연무장)였다.
 계해(1623)년 삼월에 인조(1595~1649,  和伯 松窓는 綾陽君선조의 손자이고 부는 定遠君(元宗으로 追尊,1580-1619), 어머니는 仁獻王后 具氏(1578~1626)이다)가 반정한 뒤엽이 등불 아래 홀로 앉아 칼을 어루만지며 탄식하고 있는데 창밖에서 기침 소리가 들렸다엽이 물었다. "누구냐" "아무개올시다." "무슨 일로 왔는고." "공은 장차 어떤 계책을 세우시렵니까." "나에겐 정해둔 계책이 없으니 어디 자네에게 물어봅세." "상책과 중책과 하책이 있으니 청컨대 이 중에서 택하십시오." "무엇이 상책인고." "군사를 일으켜 스스로를 방어하고 북으로 금나라와 내통하십시오그러면 임진강 서쪽은 조정의 국토에서 떨어져 나올 것이며또 아래로 위타( 趙氏,南越王으로 반역하여 皇帝 僭稱史記 南越列傳第五十三 참고)처럼 황제를 칭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이 중책인가.” "급히 병사 삼만 명을 동원하여 제가 그들을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하게 하신다면 누가 이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책은 무엇인고." "공은 대대로 나라의 녹을 받은 신하이니 순순히 나라의 명을 받드는 것이 가한 것입니다." 엽이 한참을 깊이 생각하다(沈吟)가 한숨을 쉬고 탄식하며 말했다. "나는 하책을 따르겠노라." 그러자 그는"그러면 저(중국말로 평민이 관리에 대하여 자기를 일컫는 말)는 이제부터 종적을 감추겠습니다."하고는 간 곳을 알지 못했다어떤 사람은 그가 용골대였다고도 말한다엽이 조정으로부터 사형의 명을 받을 적(後命귀양살이를 하는 罪人에게 死藥 내리는 일)온 조정에서 모두 그가 예사로운 사람이 아니라 하고 겁을 내어 감히 명을 집행하러 가려는 자가 없었다.
  구인후(1578~1658, 인조의 외종형仁獻王后 姑母)가 예전에 그의 막하에 있어보아 엽의 사람됨을 익히 알기에 자청하여 평안도로 내려갔다엽이 원수를 진 집안이 많아 그 사람들이 한꺼번에 칼을 들고 쳐들어오자,인후가 엄하게 그들을 막고서 시신을 관에 넣고 염을 하여 이송(治靷=發靷)하였다상여가 중화군에 이르자마침 인후가 御營大將으로 임명되어 먼저 서울로 돌아가게 되었다이 틈에 원수진 집안에서 쫓아와 관을 뻐개고 시체를 들어내어 마디마디 잘라버리고 가버렸으니이는 곧 천인의 연고임에서라엽이 소시 적에 운수를 점쳐보았더니천인을 죽여야 자신이 살 수 있다는 점괘가 나온 일이 있었다千人 바로 인후의 어릴 적 이름인데도 엽이 그 사실을 미처 모르고 애꿎은 사람을 무수히 죽여 천 명을 채우고자 했으니 어찌 그리 어리석었던가.
 엽이 죽음의 명을 받았을 때(賜死)힘센 자로 하여금 목에다 줄을 매어 잡아당기게 하고서 목숨이 끊어짐에,그 즉시 큰 길에서 行刑하는데이 때 창기들이 와서 구경하자 어떤 사람이 말했다. "너희들은 모두 감사가 사랑한 기생들인데죽는 것을 보고도 곡도 하지 않고 태연히 서서 구경만 하니 어인 일인가그러자 기생들은, "새로 온 사또(使道)에게 수청(守廳隨廳)들러 왔소."하고 서로 즐겁게 웃으며 가버렸다.

이원명이 지은『동야휘집』

2010년 12월 7일 화요일

제사의 의미

현일선생님께 들은 말씀을 기억해 올립니다.

조상들의 유습 정도로만 알고 지내던 많은 전통적 풍습과 예식들 이면에는, 일반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많은 부분들에 대한 숨은 배려가 있었다.

제사를 예로들면 조상들의 백을 안정시키려 하는 것으로, 죽음 뒤의 백이 홀로 겪게 되는 방황과 두려움을 덜어주고자 조상의 백이 친숙하게 느낄 수 있는 자손들이 그 백을 불러 안정을 주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백은 통상적으로 350년 간 있다가 다음 생을 찾아간다고 한다.) 수도자의 경우 그 백을 불러들이기 쉬운 일이나, 일반인은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제사전 10일간의 치제, 산제를 통해 조상에 대해 마음을 내고 떠올려서 조상의 백이 찾아오도록 하는 과정인 것이다. 

사당을 만들고 신주를 차리는 것은 백이 찾아들어 안정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아래는 이동후 편저, <상변약고常變略攷> 에서 발췌한 참고 자료입니다.


제사의 의미
 
가. 제사의 뜻
 
율곡은 격몽요결의 제례장에 대체로 제사는 사랑과 공경스런 마음으로 정성을 다 할뿐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집이 가난하면 살림의 형편에 따라서 제사를 잘 지내거나 못 지내는 것이며, 또 건강에 이상이 있어서 제사지내기가 어려우면 자기의 몸 형편을 참작하여 제사를 지내라고 했다. 그리고 만약 살림이 넉넉하면 예법 데로 잘 하는 것이 옳다고 했다.
 
나. 제사에서 조상을 그리는 마음
 
제사는 조상이 평소에 하시던 모습을 그리며 조상의 기대에 따라서 바른 인간이 되는 길이기 때문에, 예기 제의에 보면, 제사에 앞서서 제계(齊戒)가 행하여지지만 이것에는 마음속에서 하는 치제(致齊)와 외물(外物)에 대한 산제(散齊)가 있다. 제계하는 동안에는 항상 제사지내려는 고인의 생전에 기거하든 모습이나 담소하시든 일, 가정 일이나 자손들에 바라는 바, 생시에 즐거워하시던 일, 그리고 평소에 즐기시는 것 등의 생각에 젖어있으면 제계를 한지 삼일정도만 되면 드디어 고인의 모습이 끊임없이 눈앞에 떠오르게 된다. 이리하여 마침내 제삿날이 되어서 사당의 방안으로 들어서면 반드시 고인의 영혼이 그 자리에 계시는 듯이 어렴풋이 느껴지게 되며, 제례가 끝나고 문을 나가려고 할 때면 반드시 엄숙한 기분에 젖어 고인의 음성을 듣는 느낌이 들며 그리고 문밖에 나가 들으면 반드시 방안에서 뚜렷하게 고인이 자손들을 걱정하여하는 탄식의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것이라고 했다.
 
다. 제삿날은 어떤 날인가?
 
제사 날에는 내 마음이 제사가 드는 그 분 한 곳에만 쏠리기 때문에 다른 사사로운 일에는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다.

출처:

광룡정  | 글쓴이: 경명 원글보기

2010년 12월 3일 금요일

심도 心道 tao



심도

<출처> 다음카페 광룡정 - 현일선생


이것을 자발공이나 기타 여러 단체마다 이름과 방법이 있는데 심도라고 하는 이유는 이것이 단순히 신체의 움직임이나 어떤 효험을 염두에 두고 수련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인데 삶의 깊은 근원적 이해와 우리 신체활동의 인식의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세계에 살면서 나고 자라고 성장할때 익숙해진 신체 움직임이 있다. 당연히 손과발을 움직이고 힘쓰고 말하고 생각하며 오고 가는데 이것이 당연한 것이고 이거 외의 것은 인정하지 않게 되어있다. 쉽게 말해 뇌의 작용으로 우리몸은 통제되고 조절되고 있다는 것이고, 곧, 뇌가 우리 자신이 된다고 하는 상식적 수준의 이해를 말한다.

여기서 한발더 나아가 뇌를 한번 더 상위에서 통제하는 방법이 있는 것을 말하는데 우선 우리는 뇌가 생각하고 몸을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하는 것이라고 예전부터 그리고 내가 전에도 그렇게 말햇다.

다시말해 팔을 하난 올리는데 아님 움직이는데 지금까지 와는 다르게 내가 지켜보면서 명령이나 생각을 주게된다. 다시말해 움직였으면 하는 생각을 한후 그렇게 움직이게 되는 내 신체를 관조하는것이다.

나를 내가 운전하듯 그렇게 제삼자 처럼 다루는 것이다.
내몸 밖으로 나가 있듯이 할 필요는 없고 해도 되지만...
그냥 평소처럼 손을 움직이면서 움직이는 손을 내손 아니듯 무심히 또는 남의 손보듯 보는것이다.

몸이 저절로 움직이거나 접신된 것처럼 발광하는것도 물론 있을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하고자하고 중요한 것은 나를 즉, 내육체를, 감정을, 생각을, 생리활동등을 내의지로 벗어나고 들어오고 하며 나인듯 나아닌듯한 경험을 하는것이며 감정과 생각과 육체등 모든 나의 당연한 것에서 한발 물러나 관망하는 더깊은 내 심연적 깊이를 느끼는 것이다.
나를 벗어나 내움직임을 보면서 나를 발견하는것이고 내감정만 관찰하는것에서 나아가 내몸도 관찰하는것이고 이렇게 내가 나를 관찰 할수 있다는것을 아는것이다. 나아가 나에게 순응하고 천지에 순응하며 살아가는것을 아는것이다.

내가 살아움직이고 있다는것을 보는것인데 방법은 자발공이나 시해나 아님 단순히 나를 제삼자처럼 보는것이나 방법은 많지만 결국 이것이 내가 나이면서 아닌것이라는것을 이해하는 것이고 무아를 아는것이고 법의 공을 알아 가는것이다. 그렇게 지켜보는 나도 인위적 설정이지 본래는 아니니 오로지 그러할뿐 아무것도 아닌것이다.

그래서 이 수준에서 혼을 빼거나 비슷한 분심술을 하는것도 같은 이유에서 하는것인데 기술은 하는데 지혜는 없다. 나에게서 벗어난다고 두려울것도 없고 이상할것도 없다. 나를 넘어 그 이상을 추구하는 여유와 신체의 영역적 한계를 넘어 더깊고 더 넓은 세계를 경험하는것이다. 정말로 손과발이 남의 것처럼 저절로 움직이는 것도 있지만 이게 흔히 자발동공같은 말로 한다. 내 움직이는 손발을 내가 그냥 관조하는 것도 있다. 위빠사나가 비슷한가...

이것도 관찰의 응용이고 더나은 지혜의 깊이다.

2010년 11월 29일 월요일

양직공도(梁職貢圖)속의 백제국사(百濟國使) 제기(題記)

『양직공도 梁職貢圖』해제


분류 : 잡사류
편저자 : 양 원제 梁 元帝
시기 : 526~539년 사이


『양직공도』는 중국 남경 南京 박물관에 소장된 한 장의 직공도 職貢圖(또는 사신도 使臣圖)를 가리키는 것으로, 중국에 입조入朝한 백제국 百濟國을 비롯한 12명의 각 국 사신들의 모습을 그리고 각 사신의 형상 뒤에 그 나라의 상황과 역대 중국과의 교류에 대한 간단한 제기 題記가 있는 형태이다.


『양직공도』는 각 국 사신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당시 중국 주변 제국 사람들의 용모와 복식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회화 사료이며, 또한 『양서 梁書』 제이전 諸夷傳에 나오지 않는 내용도 제기에 기록됨으로써 당시 중국 주변 각국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문자 사료이기도 한데, 우리나라 역사와 관련해서는 사료가 적은 백제사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사료라고 할 수 있다.


백제국 제기 百濟國題記는 193자에 불과한 내용이지만, 백제의 역사, 중국과의 교통, 고구려와의 관계, 정치 제도, 주변 지역에 대한 서술, 언어, 풍속 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양직공도에 백제 사신의 모습은 발을 약간 왼편을 향하여 나란히 하고 있다. 단아한 용모에 관(冠)을 쓰는 좌임(左扉)의 대수포(大袖袍)를 무릎을 약간 덮을 정도로 착용하고 그 아래에 바지를 입었으며, 검은 신을 신고 양손은 모은 채 가리고 있다. 백제의 복식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둘도 없이 소중한 자료이며, 특히 삼국시대 백제 사신의 모습과 이에 대한 기술은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귀중한 자료이다.
 
百濟舊來夷馬韓之屬晉末來駒驪略有遼東樂浪亦有遼西晉平縣自晋已來常修蕃貢, 義熙中, 其王餘腆, 宋元嘉中其王餘毗, 齊永明中其王餘太, 皆受中國官爵,

梁初以太 除征東將軍, 尋爲高句驪所破, 普通二年, 其王餘隆 遣使奉表云, 累破高麗,

號所治城曰固麻, 謂邑檐魯 於中國郡縣 有二十二檐魯, 分子弟宗族爲之. 旁小國有 叛波, 卓, 多羅, 前羅, 斯羅, 止迷, 麻連, 上己文, 下枕羅等附之.

言語衣服略同高麗, 行不張拱 拜不申足, 以帽爲冠, 襦曰複袗, 袴曰褌. 其言參諸夏, 亦秦韓之遺俗.



백제는 옛 래이로 마한의 무리다. 진나라 말기에 고구려가 일찌기 요동과 낙랑을 경략하고, (백제) 역시 요서와 진평현에 있었다. 진나라 이래로 백제는 번공(蕃貢)으로 항상 수교를 하고 통하였다. 의희 연간(405-418)에 부여전(전지왕), 송 원가(424-453)에는 부여비(비류왕), 제 영명(483-493)에 부여태(동성왕) 모두 중국의 관작을 받았다.

양나라 초에 부여태(동성왕)가 정동장군을 제수 받았다. 얼마 뒤 고구려를 격파했다. 보통 2년(521년)에 부여융(무녕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려 여러 번 고구려를 무찔렀다고 했다.

백제는 도성을 고마라 하고 읍을 담로라 하는데 이는 중국의 군현과 같은 말이다. 그 나라에는 22담로가 있는데, 모두 왕의 자제와 종족에게 나누어 다스리게 했다. 주변의 소국으로는 반파, 탁, 다라, 전라, 사라(신라), 지미, 마연, 상기문, 하침라 등이 부속되어 있다.

언어와 의복은 고구려와 거의 같지만, 걸을 때 두 팔을 벌리지 않는 것과 절할 때 한 쪽 다리를 펴지 않는다. 모자를 관이라 부르고, 저고리를 복삼, 바지를 곤이라 한다. 언어에는 하나라의 말이 뒤섞여 있으니, 이것 또한 진한의 습속이 남은 때문이라고 한다.



2010년 11월 28일 일요일

일본왕의 상징 삼종신기 三種神器




일본 창조신화를 보면 태양의 신 아마테라스오오카미는 자신의 손자 호노니니기에게 인간세상으로 내려가 그 곳에서 인간을 다스리라며 옥구슬, 거울, 3가지의 보물, 이른바 삼종신기를 주며 인간세계로 내려 보낸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자손이 천황天皇이며 만세일계(영원히 한 혈통으로 이어진다.)가 된다는 것인데, ‘인간이면서 신’이라고 불린다.
원래 천황이 이렇게 존귀한 존재가 된 것은 아닌데, 이는 일본의 수도를 나라로 옮기며 천무천황天武天皇이 대왕이라 불리던 자신의 칭호를 천황으로 바꾸며, 자신의 왕권과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일본서기와 고사기를 짓게 만들고 자신과 자신의 가문을 신의 가문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2010년 11월 27일 토요일

평양 인근 출토 신금석문(新金石文)

  

  


1930년대 평양 인근에서 출토된 것을 한 개인이 소장해온 유물로, 네모 모양의 점토판 표면에 290여자의 글씨를 새긴 후 구리 가루를 홈에 채워 넣고 불에 구운 것으로, 벽에 걸 수 있도록 구멍을 뚫어 놓았다. 아래는 비문의 초역이다. 
 

 
< 碑文 1 > ‘始七年十月’ 흙으로 구운 네모판 비(碑) (‘始七年十月’銘 塑造四角板碑)
 
- 흙으로 구워 만든 네모판(四角板)에 새긴 글(모두 134자)
- 크기 : 가로 25㎝, 세로 26㎝, 두께 2.3㎝
- 위쪽에 벽에 거는 구멍이 2개 있는데 왼쪽 것은 깨지고, 오른쪽 것은 못이 남아있다.
 
 
正始武侵宮百殊固諫慾還亡命
存其固都誠不耐城遣訖繼創邑都
護殊百位麓酋(委+台)七年十月繼明王
寧東國吏玄菟沸流安泰天歲
禮樂世百濟高麗殊代天府祖鄒牟
王以城民之意秋八月步騎二千戰
儉혁(赤+見)峴岭攻數千里降士數千國宮
前臣高伏儉城北王盲記天地之
中銘存永世隨登愿此碑永立以
傳百世紹示百殊城民
 
 
正始武侵 宮百殊固諫 慾鎩
정시 연간에 병란이 있었다. 궁(宮) 백수(百殊)가 간곡히 간(諫)하였으나 죽이려한 일이 있었다.
 
還亡命 存其固都 誠不耐城
망명에서 돌아와 옛 수도를 보존하고 불내성을 튼튼하게 하였으며,

遣訖繼 創邑都 護殊百位麓酋
흘계(訖繼)를 보내 도읍을 만들고 수(殊) 백위(百位) 녹추(麓酋)를 통솔하였다.
 
委+台(始?)七年 十月 繼明王 封护寧東國 吏玄菟沸流
始 7년 10월 명철한 왕을 이어 영동국을 봉해 개척하고, 현토와 비류를 다스리니,
 
安泰天歲禮樂世百濟高麗
평안하고 태평한 세월과 예악이 百濟와 高麗에 이어졌다.
 
殊代天府祖鄒牟王 以城民之意
수(殊)는 천부와 조상인 추모왕과 성민(城民)의 뜻을 대신하였다.
 
秋八月 步騎二千 戰儉 혁(赤+見)峴岭 攻數千里 降士數千
가을 8월 보병과 기병 2000으로 혁현령에서 검과 맞붙어 싸웠다. 수 천리를 쳐서 수 천명의 적병을 굴복시켰다.
 
國宮前臣高伏 儉鎩(?)城北 王盲
國宮 前臣 고(高)가 굴복하자 검이 성 북쪽을 뚫었고(잘라냈다), 왕이 눈이 멀었다. (?)
 
記天地之中 銘存永世隨登
천지간에 기록하고 영세토록 새겨 보존하니 隨登(?),
 
愿此碑永立 以傳百世 紹示百殊城民
이 비는 영원히 백세에 전해 백수(百殊) 성민(城民)에게 이어지기 바라노라.


 
 < 碑文 2 > ‘正始七年’ 흙으로 구운 네모판 비(碑) (正始七年’銘 塑造四角板碑)
 
- 흙으로 구워 만든 네모판(四角板)에 새긴 글(모두 50자)
- 크기 : 가로 17㎝, 세로 24.8㎝, 두께 2㎝
- 벽에 거는 구멍이 위쪽에 2개 있다.

正始武止宮不從固諫食蒿而
死殊還亡命慾鎩存其固都將
誠不耐城往丸都遣訖繼造邑
都護位殊麓酋魏正始七年
百殊宣
 
正始武止 宮不從固諫 食蒿而死
정시 연간의 병란이 끝났다. 궁이 간곡히 간하는 것을 듣지 않자 쑥만 먹고 죽은 일이 있었다.
 
殊還亡命 慾鎩 存其固都 將誠不耐城
수가 망명에서 돌아와 (慾鎩?) 옛 수도를 보존하고 불내성을 튼튼히 하고자 하였으며,
 
往丸都 遣訖繼 造邑都 護位殊麓酋
환도(丸都)에 가서 흘계(訖繼)를 보내 도읍을 만들고 위(位) 수(殊) 녹추(麓酋)를 통솔하였다.

魏正始七年 百殊宣
위(魏) 정시(正始) 7년 백수(百殊)가 선포하노라
 
 

< 碑文 3 > ‘遂成王10年’ 흙으로 구운 여덟모기둥 비(碑) (‘遂成王10年’銘 塑造八角柱碑)
 
- 흙으로 구워 만든 여덟모기둥(八角柱)에 새긴 글(86자)
- 밑바닥 지름 13×12.5㎝, 윗면 지름 9×8㎝, 높이 20.5㎝
 
 
始祖之孫日月之子承故夫余
故邑遂成王十年東西南北殊
 
繼明帝逐多寧東百殊
司吏玄菟定邑都沸流安
 
久泰長歲禮樂以百濟高句
麗殊代天府繼祖鄒牟王意
 
民泰國安百殊心意□□
年功建國都玄菟郡紒継
 

始祖之孫 日月之子 承故夫餘 故邑
시조의 후손, 해와 달의 아들이 옛 부여와 옛 땅을 이어받았다.
 
遂成王十年 東西南北殊 繼明帝 逐多拓寧東
수성왕 10년 동서남북의 수(殊)가 명제(明帝)를 이어 영동(寧東)을 몰아내고 개척하였다.
 
百殊司吏玄菟 定邑都沸流
백수가 현토를 다스리고 비류에 도읍을 정하니
 
安久泰長歲禮樂以百濟高句麗
평안과 태평세월, 예악이 백제와 고구려에 미쳤다.
 
殊代天府 繼祖鄒牟王意 民泰國安
수(殊)가 천부를 대신하고 시조 추모왕의 뜻을 이어 백성을 태평하게 하고 나라를 안정시켰고.
 
百殊心意□ 年功 建國都 玄菟郡紒継
백수가 마음과 뜻□□ 년 공을 들여 국도를 건설하고 현토군을 넘겨 받았다.


2010년 11월 26일 금요일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


(甲)寅年正月九日奈祗城砂宅智積


慷身日之易往慨體月之難還穿金


以建珍堂鑿玉以立寶塔巍巍慈容


吐神光以送雲峨峨悲貌含聖朗以




[해제: 이용수]


"(갑)인년 정월 9일, 내지성의 사택지적은 나날이 몸이 쉬이 감(나빠짐)[불교 '이왕': 아미타의 본원에 의하여 극락에 쉽게 왕생하는 일?]을 슬퍼하고 다달이 몸이 돌아오기 어려움을 슬퍼하며 금을 뚫어 진귀한 당을 짓고 옥을 깎아 보배로운 탑을 세웠다.


높고 큰 자애로운 모습은 구름을 쫒아 신령한 빛을 토하고 높고 높은 은혜로운 자태는 ...함으로써 성스러운 밝음을 머금었다."


사택지적은 백제의 8대 귀족가문의 하나인 사택씨砂宅氏(사씨) 출신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 황극기 원년(642) 조에 의하면 그는 대좌평大佐平으로서 왜(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기록되어 있다. '대좌평'이라는 최고위 관등을 지니고 활동하였으나, 의자왕 14년(654)에 정계에서 밀려났다.


사택지적은 스스로를 내기성奈祇城(내지성?) 사람이라고 하였다. 종래에는 사택지적이 정계에서 물러나 부여가 아닌 내기성으로 은퇴하였다고 보는 설이 있었다. 하지만, 이 비석이 내기성 지역이 아니라 부여 읍내에서 발견된 점으로 보아, 내기성은 사택지적의 출신지를 뜻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내기성에 대해서는 부여 은산恩山을 가리킨다는 설과, 부여 가까이의 매라邁羅지역을 가리킨다는 설이 있다. 사법명沙法名에게 ‘행정로장군매라왕行征虜將軍邁羅王이라는 작호가 주어진 것이 있고, 또 부여 가까이의 궁남지宮南池에서 출토된 목간에 매라의 지명이 들어 있는 것에 근거하여 그렇게 설명하는 것이다. 사택씨 즉 사씨들은 부여인 사泗에서 활동하였다. 사택지적도 정계에서 물러나기는 하였으나, 부여 안의 저택에 거쳐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매우 강한 불교적 색채가 느껴진다.


2010년 11월 23일 화요일

전쟁은 40대 이상만 가라

'전쟁은 전부 40대 이상의 사람만 가라. 나이 먹은 사람들이 자기들은 전쟁에 안 가니까 쉽게 결정해서 젊은 사람들을 죽게 만든다. 그러니까 나이 먹은 사람들이 전쟁에 나가서 죽든 살든지 해야 한다.'

- 찰리 채플린 -

야사野史에 보이는 박엽과 청태조 누루하치

박엽朴燁은 조선 오백년을 통하여 가장 출중한 문무겸전의 영걸이었고, 팔도의 재사才士, 술객術客, 장사壯士들이 모두 그에게로 운집雲集하였다. 조선조의 문관으로 1570년(선조3년)에 태어나 1623년(인조1년)에 졸卒하였다. 자子는 숙야叔夜, 호는 국창菊窓, 본관은 반남이다. 1597년 선조30년에 문과에 급제, 내외직을 역임하여 가는 곳마다 치적을 올렸다. 함경남도병사가 되어 성지城池를 수축하여 북서의 방비를 공고히 했고 황해도병사를 거쳐 평안도 관찰사가 되어 6년 동안에 치적이 나타나서 명성이 높았다. 북쪽 오랑캐들의 동정을 잘 알고 방비하였으므로 그들의 감히 연변沿邊을 침범하지 못하였다. 당대의 권신 이이첨을 모욕하고도 무사하리만큼 명성을 떨쳤다. 인조반정후 그의 부인이 광해군의 인척이었다는 이유로 그를 두려워하는 훈신들에게 모함을 받아 사형 당하였다. 숙야는 기운이 절륜하여 6, 7세에 이미 그 오줌줄기가 담장을 넘었다고 하니 가히 그의 정력을 짐작할 수 있을 만 하다.
그가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의 일이다. 매일 밤 초저녁이면 감영을 떠났다가 새벽녘에야 돌아오는 일이 자주 있었다. 하루는 그의 첩 소백주가 참다 못하여 한마디 참견을 하였다.
「무슨 재미가 그토록 진진하여 밤새는 줄도 모르고 계시오니까?」
「그게 무슨 소리인고?」
「그렇지 않으시다면 어인 일로 밤마다 출입이 그토록 늦기까지 하시겠습니까?」

숙야는 사랑하는 첩의 영문을 모르고 하는 말에 그저 빙그레 웃으면서 답하는 말이
「아녀자가 참견할 바가 아니니라, 긴한 일이 있어 며칠 늦은 것이니 그리알라」하고 달랬으나 소백주는 물러나지 않고 응석부리듯이
「그토록 재미있는 일이라면 소첩도 한번 데려가 주시겠습니까?」하고 보채었다.

숙야는 엄숙한 안색을 하면서도 그날 밤 소백주를 말에 태우고 질풍같이 어둠속을 달렸다. 어찌나 빨리 달리는지 뒤에 탄 소백주의 눈에는 먼곳의 불빛과 귓전의 바람소리만 들릴 뿐이어서 어디를 얼마나 가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였다. 한참이나 달리고 난 후에 숙야는 말을 서서히 멈추어 낮은 소리로
「예가 만주 안동 땅이다. 내 지금부터 하는 일을 너는 예서 조용히 숨어 구경이나 하여라」고 일렀다.

숙야는 곧 청태조 ‘누루하치’의 군영을 찾았다. ‘누루하치’가 조선을 도모코저 안동까지 진출하여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숙야장군 단 한사람의 위력에 눌려 오지도 가지도 못하고 있는 판이었다. 숙야는 거침없이 ‘누루하치’에게 말하였다.
「자 오늘은 최후 결판이다. 다시 또 무슨 군말이 있다면 너 “누루하치”도 대장부가 아니니라」

여러날 밤, 두 사람이 재주를 겨루어 왔던 것이다. 게다가 “누루하치”는 재주가 밀릴 때 마다 이러니 저러니 구실을 붙여 다시 대결하기를 청했던 것이다. “누루하치”도 더는 염치없어 오늘밤을 결판의 날로 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말없이 대결하였으나 내리치고 찌르는 한수 한수는 온갖 비법과 운신의 정력을 기울인 필살의 일창一槍과 일검一劍이었다. 처음에는 말을 타고 겨루던 두 사람이 나중에는 창칼만 번쩍일 뿐 사람은 보이지 않고 용호상쟁하는 신묘神妙를 다하는 기량의 대결이라 숨어 보던 소백주는 숨이 막힐 듯 하였다. 부질없는 아녀자의 질투로 사랑하는 이를 잃는가 걱정도 되었겠지만 한편 자신이 모시는 어른이 저토록 훌륭한 분인 것을 어찌 감히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다만 침을 삼키고 숨을 죽이고 바라볼 뿐이었다.
한참만에야 호령하는 숙야장군의 말소리가 우렁차게 들리었다.
「자 이젠 어쩔텐가? 그래도 감불생심敢不生心 이 나라를 넘보겠는가?」 땅에 떨어진 “누루하치”의 목에 칼을 겨누고 하는 일갈이다.
「알았소이다 이제 다시는....」“누루하치”는 끝을 맺지 못하였다.

그 또한 장정 만 명이 당해내지 못할 용맹을 자랑하던 장군일 뿐 아니라 수년을 계획한 대사大事를 말 한마디 못하고 포기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 허탈감은 어떠했으랴. 결국 “청태조 누루하치”는 전군을 이끌고 회군하였다. 한 번의 접전도 해보지 못하고 패전한 것이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회군하던 청군은 캄캄한 칠야에 진퇴유곡에 빠지고 말았다. 분명 어제까지 훤하게 나있던 길은 간데 없고 앞에는 층암절벽에 그 밑에는 퍼런 강물이 출렁이고 있으며 뒤에는 천군만마를 거느린 대장군 숙야가 버티고 서있는 것이 아닌가? “누루하치”는 고개를 떨구고 숙야 앞에 섰다.
「회군하라 하시면 길이라도 열어주시기를...」 숙야는 말없이 손짓하였다.
「어서 가보아라」

청의 대군은 소리없이 회군하고 말았다. 이제는 절벽도, 강물도 이미 다 사라지고 없었다. 그후 청군의 군사들은 숙야장군을 군신軍神처럼 우러러 보았다 한다. 이와같은 비범한 술수는 어디에서 누구에게 배웠던가? 그는 어려서부터 타고난 절륜의 정력을 살려 스승 송구봉선생을 따라 단학의 좌우양도를 아울러 닦은 분이다. 또한 그 계제가 상당히 고계高階에까지 올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뒷날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왕위에서 물러났을 때 바로 그날 한 사람의 부장副將이 나타나 숙야장군께 아뢰기를
「소장 문안드립니다. 」
「그대가 웬일인고」
「나라에는 반정이 있었습니다」
「 나도 알고 있느니라」
「 장군은 장차 어찌하시렵니까? 소장이 세 가지의 계책을 아뢰올까 하옵는데 들어주시렵니까?」 숙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러면 아뢰겠습니다. 이제 대감이 거느리는 휘하의 십만군졸을 휘몰아 중원을 들이치신다면 천하는 가히 뉘 손에 넘어갈지 알 수 없는 일이니 한번 꾀할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상책이올시다. 다음은 청인淸人과 힘을 합하여 천하의 일을 꾀하신다면 천하는 비록 양분이 될지언정 더욱 확고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중책이올시다.」

그러나 숙야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마치 명상에 잠긴 듯 눈을 감은 채 말이 없는 것이다. 부장은 말을 이었다.
「그러면 마지막 하책을 아뢰겠습니다. 평양의 군졸을 이끌고 주야로 길을 달려서 서울로 향하신다면 전왕前王을 다시 뫼시는데 3일 까지야 걸리겠습니까?」 숙야는 조용히 눈을 떴다.
「부당한 일이다. 혼군(광해군을 지칭)이 아니시드냐? 수많은 백성이 도탄에 빠지는 줄 알면서 어찌 홀로 나만의 안녕과 영달을 위하여.....」그는 말을 잇지 않았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른다면 그의 말대로 준마 비껴타고 천군만마를 호령하여 한번 천하를 도모해보고 싶기도 하지만 이제 민족의 운은 쇠하여 대륙의 한귀에 몰리고 그 체통마저 이어가기 어려운 형편이 아닌가? 너무나 훤히 내다보이는 앞날이었다.
「물러가거라」
「하오면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시렵니까?」그는 말없이 눈을 감았다.

과연 그 후 곧 어명에 의하여 숙야장군은 사형되었고 휘하 몇몇 장사들은 편협한 조정의 처사에 반발하여 청나라로 망명하였다. 그때 계책을 올리던 부장이 바로 후일 청나라의 용골대이다. 숙야장군없는 조선은 텅빈 성곽과도 같았다. 역시 박엽의 수하부장중의 하나였던 임경업장군의 용맹도 청군의 지략과 무력앞에는 속수무책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