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reat Learning 大學

The Great Learning 大學
Translated by
A. Charles Muller
First translated during the summer of 1990. Revised 2010.11.29




1 大學之道、在明明德、在親民、在止於至善。
The way of great learning consists in manifesting one's bright virtue, consists in loving the people, consists in stopping in perfect goodness.


현일(玄一) 선생 풀이

이것을 대학은 도가 명명에 있고 덕은 신에 있고 민은 성에 머물게 하는데 있다고
봉우 권태훈님은 굳이 주장하며 구분하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대학에는 도와 덕, 그리고 민에 대한 사업이 있다고 보며 이것이 대학의 가르침이다.

도에서 덕으로 그 다음은 민으로 가는 내 안에서 내 주변, 세상으로 퍼져가는 순서가 맞다.
수련하면 원신 그리고 원광을 키우는 순서와 같다.
항상 내 주관이 중심이고 외부나 그 외의 신을 포함한 모든 대상은 2차적이다.

존재하는 것은 이기적이다.
스스로 선택에 의한 이타적인 것이 아닌 한 내 중심적이다.
인격의 완성도 없는 자에게 배려나 착하게 살라고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다.
불가능한 것을 시키는 것으로 슬픈 일이다.

도가 明明에 있다고 하니 밝음을 밝힌다고 하지만, 이미 밝은 것을 밝히면 뭐가 되는지 모르겠다.
밝으면서 밝지 않아서라고 하면 이건 또 먼가

한번도 밝아본 적 없는 것을 밝은 것이라고 하면 안되고
이미 밝은 것이라면 어둡지 않으므로 손댈 필요 없어야 밝은 것이다.
불교에서처럼 때가 끼었을 뿐이고(이것도 개그네~) 생멸문이 어떻고 진여문이 어떻고 하면서 구분하면 진여나 밝음이 무엇인지 오해가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한번 밝으면 그만이고 다시 밝힐 필요 없다.
눈부신 자신의 빛을 보았으면 알 것이다.
이것은 어두워지거나 때가 끼거나 하지 않고 영원하다.
어쩌면 범주오류가 아닌가 한다


진여인데 왜 생사고락 하는가 하면 누가 생사고락 하면서 진여인가
부처가 그렇다면 부처는 일부로 생사고락 하는 것이지 생사고락에 매몰된 것이 아니다. 이는 선택이다.
선택하고 그렇게만 하는 것을 밝지 않다고 한다면 안 된다.
빛을 끄고 어둡고 약하고 강하고는 조절이다.
자신의 진여는 자기가 통제하는 것이다.
무슨 이유로 어두어졌다가 밝았다가 할까
내가 원하기 때문이다.

그 외 밝아진 적 없는 자는 먼저 밝아지는 것이 먼저이다.
그러니 이들은 밝아질 수 있으니 밝아져야 한다고 한다.
아니면 밝게 밝힌다고 하든가
무한한 가능성의 창조력을 지니는 것이 가장 큰 신비이고 신의 유일하고 위대한 기적이다.
신은 이것 외에 별 소용이 없는 존재이다.

44단이 넘으면 생사고락이나 어두워지거나 때가 끼지 않는다.
여기를 못 가고 함부로 논할 것이 못 된다.
지인을 제외하면 배달 외에 여기를 이른 자는 이지구상에 없다.
여기부터 수도인들이 소망하는 온전한 진여요 성이요 밝음이다.
완전한 불성이다.

덕은 신이나 친으로 해석하는데 같은 말이다. 신은 시작을 중시하고 친은 반복을 중시하는데 새로우면 친해질 수 없는데 그래도 같이 쓴다면 신도 아니고 친도 아닌 신이면서 친, 친이면서 신이다.
어렵게 돈오점수이다 새롭게 깨달으면서 반복해서 익혀서 내 것으로 해야 한다.
세상일이라는 것이 시작하고 이어가고 또 새로운 것을 하고 반복하면서 끊임없이 살아가는 것이다.

덕은 나 자신과 가까운 내 주변과 내외를 결합하고 터를 지키며 세를 만들어가는 터전을 일구는 것이다.

윤리를 도덕으로 마구 사용하는 세대가 아쉽지만 말의 변화는 새로움의 한 예이니 반대할 수 없고,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억지로 막을 생각은 없다.
통제는 가장 큰 폭력이고 강압적 분노일 뿐이다.

민을 선에 머물게 한다는데 이것이 통제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과거에나 현재나 그렇게 하려는 못된 자가 많이 있는데 아둔한 것의 행위는 언제나 그럴 것이다.

대학이 사람을 선하게 한다는 것이다
내가 대학을 공부해서 사람을 제어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을 과거 관료들이 백성을 다스리는 근거로 사용했는데 도나 덕을 모르는 것들이 민을 못살게 군것일 뿐 가치 없는 역사이다.
이건 군자의 학문이다.
오직 자신의 내면에서 시작해서 내면에서 끝나는 것이다.

하지만 정치나 다스림, 통제나 지도를 안 하는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지배를 선이라고 했는데 그가 생각하는 지배와 선이 무엇인지 모르지만......(기억력의 한계로 출처는 몰라요)

어떻게, 무엇을, , 누가, 언제. 어디를......
미륵불반가사유상의 사유는 언제 끝나려나......

쉽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닌데,
그래서 성인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인데,
성인도 못된 사람이 사람을 너무 못살게 한다.

정치를 꼭 해야하는지 정부나 국가를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많은 것들이 우리는 내 선택과 허락 없이 나를 통제하고 강요를 한다.

무조건 딴지걸고 아니라고 하는 것은 아니지만 항상 그들은 자신의 행위가 옳은 것이라는 것을 직접 행위로써 증명해야 한다.

우린 그들과 친하지 않다.
권위와 자만과 겸허가 부족한 사람들이다.
새로움도 없고 구태의연하다.

그래서 새롭고 친한 것은 중요하다.

굳이 밖에서 대상을 찾아 이런 것을 생각하지 않아도 내가, 내 생각이, 행동이, 고정관념에, 선입견에, 편견에, 사로잡혀 있지 않은지 생각해보고 모든 당연시 여겼던 것들을 끄집어내어 다시 하나하나 검증해야 한다.
비판, 검토, 반성은 중요하다.

내가 원하고 이해하고 좋아하고 알고 있는 것이 꼭 그래야 하고 그것이 아니면 안되고 다른 것은 안되는데 거꾸로 또는 발상을 바꾸어 생각하고 어릴 때부터 생각하고 있는 것을 차근차근 되새김질하며 검토해야 한다. 그것도 여러 번......

누군가 과거가 보이며 내가 산 것을 거꾸로 되돌려 보여지는 것이 있다고 하는데
투시 수련에서 이것을 하는 이유가 자신의 삶과 기억 사고방식을 다시 재구성하고 가치판단을 어떻게 하고 무엇을 원하고 내가 누구이고 누구였는지를 되새김하는 것이다.
이유도 모르고 봐도 모르는 투시는 안하는만 못하다.
전생은 왜보아야 하고 내가 나를 왜보아야 하는지..
이걸 알면 더 이상 알 필요없고 전생이나 나를 볼 필요없다.
모르니 보이는 것이다
제발 의미나 좀 알고 능력을 갈구해라
책 덮고 글을 읽는다는 쓰잘데기없는 것에 집착 말고 한글자라도 제대로 이해해요
평생 한 구절 이해하기도 힘든 것입니다.
도가 뭔지 알려고
덕이 뭔지
신은
..
하나만 알아요 하나만
이 짧은 대학을 이해합니까
그러고도 3단이 아니면 가짜요 이런 것이 수도입니다.
아는 것과 성취가 하나입니다.

과거나 내 자신을 돌아보고 성찰하는 것은 자아성장의 초기단계이고 인식의 확장(각성, 깨달음다음에 오는 지적 성찰이며 내 욕망과 마음을 이해하는 과정이다.



2 知止而后有定、
When you know where to stop, you have stability.
定而后能靜、
When you have stability, you can be tranquil.
靜而后能安、
When you are tranquil, you can be at ease.
安而后能慮、
When you are at ease, you can deliberate.
慮而后能得。
When you can deliberate you can attain your aims.


현일(玄一) 선생 풀이

알아야 정할 있고
정해야 고요해지고
고요해야 편안하고
편안해야 생각하고
생각해야 얻는 것이 있다.

무엇을 알아야 할까 수련을 알고 내가 원하는 것을 알고 뜻을 알게 되어 내가 가야 할길 내가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내가 나의 이것 저것을 알고 시작해야 한다.
나를 모르고 어디서 누가 무엇을 하겠는가
나에게서 내가 수련을 하는 것이다.
어떻게 것인지 이런저런 많은 정보와 자료의 공부는 필수이다.
중에 내가 하고 싶은 것과 맘에 드는 것을 골라한다.
수련은 내가 아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내가 원하는 모습으로 되어간다.
이것이 기본체계이다.

알아야 한다 그래야 알고 있는 것을 마음으로 정하는 것이다.
정하면 그대로 이루어진다.
내가 정하지 않은 것이 이루어지고 되고 있다면 부끄러운 것이다. 우연이나 타인의 의사에게만 의지하는 것과 신이나 미지의 힘에 의지하는 것은 나약한 것이다.
수련은 내가 강한 의지를 가질 더욱 잘된다.
내가 해야 한다. 내가 정하고 정한대로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은데 되는 것이 있으면 운이 좋거나 누군가 도운 것이니 겸손하고 감사한 마음을 정한다.

고요해짐은 오랜 기간 노력의 결과로 다가오는 것이거나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심리적인 것이 육체적인 것으로 엄습하는 고요함이다.
한번 고요하면 속에 들어가 것으로 하여 요령을 알고 언제나 마음을 가질 있게 한다.
고요해야 고요하지 않은 것을 알고 오고 가는 작용을 알고 욕망을 알고 이해하게 된다.

편안함은 마음이 편안한 것도 있지만 공부가 길을 찾아 안정된 상태가 되어가는 것도 있다.
몸과 마음의 조화를 얻어가면 이제 경지는 눈앞이다.

고顧는 돌이킴이다. 마음을 돌이키고 생각을 돌이키고 과거를 돌이켜보고 이것 저것 돌려가며 보고 보면서 과거에는 알지 못했던 생각하지 못했던 사실들을 알아간다.
이것은 한번만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평생 하는 것이다.
그래야 남다른 생각, 남모른 이해와 견해를 가질 있다.
이건 정말 중요하고 중요하다. 무조건 중요하다.
그래서 안安과 고顧가 최고로 중요하다.

얻음이 있으면 얻었으니 좋을 것이다


3 物有本末、事有終始。知所先後則近道矣。
Things have their roots and branches, affairs have their end and beginning. When you know what comes first and what comes last, then you are near the Way.


현일(玄一) 선생 풀이 

라디오에서 명언이라고 소개할 처음 들었다.
대학에 이런 말이 있다는 것을 알고 충격과 놀라움이 있었다.
얼른 서점으로 가서 책을 사서 보았는데 대단해 보이지 않는 것이지만 간단히 정리된 말이 깔끔해서 좋았다.
7 밖에 되는 것은 수련이나 공부의 시간적, 공간적 이해이다.

원래 집에 워낙 책이 없어 돈을 조금씩 모아 사서 보았는데 그래서 선택의 폭이 좁아 한참을 망설이며 사야 했다.
책은 20 중반 정도에서 같은데 이미 차이나는 이런 내용을 과거에 썼다는 것에 너무 화가 났다.
성경의 쓸데없는 많은 내용보다 깨우침의 방법을 설명하는 대학이 훌륭했다.
세상이 어떻다는 것보다 나를 이해하게 하는 것이 나은 것이다.
오직 관법이다. 보는 것이다.

이제 와서 우리는 어떤 책을 쓰고 어떤 가르침을 만들어 우리 것으로 당당하게 내놓을지 막막하게만 느끼었다.
아무것도 아닌 이런 것이 사실은 너무 놀라운 내용이다.
줄에 내가 느낀 좌절과 절망은 너무 컸다.
그리고 중용과 도덕경을 차례로 보게 되면서 세상사람과 과거 우리 조상이 증오스러웠다.
도대체 우리 조상은 대가리가 이렇게나 나쁜가
도덕경은 그렇다고 해도 짧은 대학이나 중용을 보고 팔리지도 않나
이런 책을 먼저 아니면 비슷한 것이라도 만들지 못하는지 한심스러웠다.

만들지 못하는 것은 그렇다고 쳐도 외우고 읽어도 이해를 못하는 것은 뭔가
왕수양은 말하나 다르게 해석하면서 새로운 학풍을 만드는데 주자의 그늘이 그렇게 큰가 아니면 우리가 애초에 멍청한가
이런 것을 때마다 조상이 뛰어났고 높은 경지를 이루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
학문이 너무 천박하다.
지금 나는 대학이나 들먹이며 여기서 벗어 나는 걸까 내가 벗어나나 우리나라 수도인이 벗어나나

정말로 도올의 도덕경의 강의를 보면서 질투와 시기심이 일어났다.
책을 보고 사람들이 모두 깨달음을 얻을 알았다.
10 년을 죽기살기로 공부하면서 혼자 알고 혼자 깨달은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책에 있었다. 논어나 도덕경은 이것이 있는지 진작에 알았다면 쉽게 것을 이라고 한숨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도 책을 읽으면 바로 깨달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도올의 강의를 듣는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도대체가 이해가 갔다.
나는 떨리며 저걸 들으면 견성하는데 어떡하지 어떡하지 하면서 조바심을 내며 듣는데
언제부터인가 이런 마음이 사람에 대한 실망으로 변했다.
그런대 지금은 수도인은 다를 알았다.
그래도 그들은 일반인과는 다른 견해나 뜻이 있을 알았다.
하지만 역시나 였다.


구절은 중요한 것과 중요한 신경 써야 것과 , 순서나 해야 조목 나누기를 정하는 것이다.
정하는 것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언제까지나 구절을 이해못할것이다.
그리고 일상생활이나 생각할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다.
너무 추상적이고 함축적이어서 평생을 두고 생각하게 되어 실천과 생활 속에서 실현시키며 이해하고 살아가는 것이다.
조목만이라도 알면 대화하기 쉬울텐데..

수련의 본이 깨우침이라는 것을 알면 조식이나 주문 기타 수련법이 방편이고 말단임을 알게 된다.
단체끼리 자신의 법만 최고하고 한다면 구절도 모르는 것이니 수준의 낮음을 어찌 것인가



4 古之欲明明德於天下者、先治其國。
The ancients who wanted to manifest their bright virtue to all in the world first governed well their own states.
欲治其國者先齊其家。
Wanting to govern well their states, they first harmonized their own clans.

欲齊其家者先脩其身。
Wanting to harmonize their own clan, they first cultivated themselves.

欲脩其身者先正其心。
Wanting to cultivate themselves, they first corrected their minds.

欲正奇心者先誠其意。
Wanting to correct their minds, they first made their wills sincere.

欲誠其意者先致其知。
Wanting to make their wills sincere, they first extended their knowledge.

致知在格物。
Extension of knowledge consists of the investigation of things.



현일(玄一) 선생 풀이



나라를 다스린다는 것은 왕이나 관료들의 정치행위로 쉽게 생각하는데, 그러면 학문이란 것이 보편적이지 않은 것이 된다.

대학을 아무나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인데 사실은 그렇기도 하다.

비밀의 지식을 찾고 숨겨진 것을 원하는 사람도 있지만, 원래 지식이란 공개되어도 알아보지 못한다.
아무나 익히면되는 것이 아니라 아무나 익히고 싶다고 익혀지지 않는다.

'"예기"' 들어 있는 것을 이렇게 분리한 것은 주자인데 그도 보통은 아닌 것이다.
예기에 많은 것이 쓰잘데없는 통제를 위한 것이지만 대학을 알면 소용없는 자질구레한 것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그런 조목들을 일이관지 하는 것이기 때문인데 지식의 메타지식일 것이다.
수련의 메타수련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대학을 알면 이상 공부는 필요 없다.
기술적 연마는 해야 하지만..
그래서 나머지는 잡술이다.

예전에도 그런 것이지만 군자지학이고 군자가 배우는 것은 이런 것이다.
우리는 지금 군자가 되려고 이렇게 수련하고 있는 것이다.
설마 잊고 있는 것은 아니지요?

그러니 여기서 나라를 다스리고 집을 가지런히 하고 몸을 닦는 것이 모든 사람이 해야 하지만 모두 하지 않으니 안타까운 것이다.
우리는 모두 군자가 되어 나라의 운명에 책임을 져야 한다.
이것이 민주주의와는 다른 권리나 주권이다.
나라에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참여하는 것이다.

인간은 나라에 종속되어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완전히 별개도 아니다.
국가는 단순히 통치기관을 뜻하는 것은 아니고 신이나 하늘, 우주, 섭리, 세계 전체적 관념들로 이것과 우리는 완전 종속이나 포함되어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벗어나서 있는 것도 아닌 둘간의 긴장관계가 있고 사이에는 무한한 거리개념과 나누어지는 가능성이 있다.

서양은 기독교적 굴복과 철학적 개인주의가 극과 극을 나누는데, 동양은 그사이의 어디쯤일 것이다.
서양보다 극단적일 수도 있고 동양보다 타협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일본처럼 종속적일 수도 차이나처럼 개인적일 수도 있다.
얼마만큼 종속되며 얼마만큼 분리되는지 끝이 없다.

그리고 이런 외에 님들은 어떤 것에 종속되어 있습니까?
, 과거 학교에서 배운 , 사회통념, 시사, 상식경전, 민족주의, 서구적 사고방식 아니면 동양적 유교적, 아니면 왼쪽보행 오른쪽보행, 북쪽으로 머리 두고 자기 아니면 동쪽?
까마귀는 재수없다(이건 소강절이 한말이고 거기에는 영감을 모르면 함부로 할말이 아니다)
흐흐 아주 사소한 것에서 거창한 관념들 혹은 나도 모르는 생각과 행동 어떤 것일까요?

강한 자나 힘있는 자는 우리에게 종속을 원하고, 역사는 그렇게 진행되어 지금은 일거수 일투족이 통제된다.
이제는 실외나 산속에서도 텔레비전을 보며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취향을 알고 따라가야 한다.
생각과 욕망도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한다.
이런 기술이 우리나라 국가발전에 도움되는 것은 알지만 사람을 지나치게 몰개성적이고 자유를 박탈하는 같아 무섭고 두려웠다.
다른 에어리언을 보는 같았다.
어미에 종속되어진 국민들 모두 같은 생각과 행동과 성향, 취향, 선택사항이 없다.
내버려둬요 ~

누구나 세상을 지배하고 싶어하고 그러기 위해 수련하고 공부한다.
하지만 이것을 인정해서 절충점을 찾지 못하면 혼란이 일어날 것이고 과거 역사가 그러했다.
못난 자들의 다툼이다.
이것의 예기銳氣를 순화시켜보려고 부처나 노자가 그렇게 애썼지만 물유본말을 이해 못하는 후인들이 망쳤을 뿐이다.
믿거나 말거나 해모수와 노자, 부처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해모수는 몰락하는 운을 잡고 한스러워하고 미래를 위해 안배만 남모르게 하고 갔으며
노자와 부처는 동쪽과 서쪽에 같은 가르침을 주지만 이해하는 자는 없고 그때의 서구는 다음을 위해 미뤄둔 것이다.
이런 것과는 상관없이 이분들은 모두 같은 분인데 그분의 후신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욕망은 충실하면서 다른 사람의 욕망은 무시하니 그렇고 마음을 바르게 한다는 것이 요즘처럼 착하게 시키는 대로 법을 지키며 사는 것이거나 순진한 것을 말하는 것으로 알면 안타깝고

세상의 흐름과 자신의 자아성찰과 그사이의 작용에서 나만의 입지를 정하는 것이라는 것을 모른다.
혈구지도는 말하는지 알고는 살아야지
역지사지, 타심통 이런 것이 마음이 바르게 사는 것이다.
바르다가 아니라 바르게 사는 것이다.
내가 사람들과 사회와 이떻게 살고 어떻게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가야 하는지가 중요하다.
이런 삶에서 바름이 있으니 바르게 사는 것이다.

구절을 보면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다.
명명이나 덕이나 치국이나 제가나 수신이나 정심이나 의성 치지 격물 모두 같은 것을 상황에 따라 다르게 말한 것이다.
어렵게 프렉탈이나 쪽거리라고 할려나
부분에 전체가 포함되는 것이려나
이런 것이 세상을 같게 보는 것이고
이걸 이해하면 다르게 보는 것도 알게 된다.





5 物格而后知至。

When things are investigated, knowledge is extended.

知至而后意誠。
When knowledge is extended, the will becomes sincere.

意誠而后心正。
When the will is sincere, the mind is correct.

心正而后身脩。
When the mind is correct, the self is cultivated.

身脩而后家齊。
When the self is cultivated, the clan is harmonized.

家齊而后國治。
When the clan is harmonized, the country is well governed.

國治而后天下平。
When the country is well governed, there will be peace throughout the land.


현일(玄一) 선생 풀이

주자는 순서와 질서를 중시했고
양명은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질서와 체계가 없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렇게만 되어있는 것도 아니다.

한쪽만 보고 다른 쪽은 외면하면 아쉬움이 남는다.
그들이 자신이 주장한 것만 알고 다른 쪽은 인정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다만 후인들이 자기의 성향에 맞는 것을 위주로 보기 때문이다.

점진적으로 나아가기도 하고 돈오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지금도 말이 많다.
원융사상은 천년 전에 끝났는데 이들은 아직도 한쪽 눈만 고집하는지 모르겠다.

연속과 불연속, 시간과 공간, 수직과 수평, 체계와 체계, 물질과 비물질, 형이상과 형이하,
이理와 사事 어떤것도 한쪽만으로 세상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사람은 자신의 성향에 따라 보는 것이 있고 한계가 너무도 크다.
설명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모두 한쪽을 택할 밖에 없다.
나머지는 자신의 몫이다.
그래서 깨우침도 모두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쩔 없는 한계는 있다.

천년 전이든 천년 후든 결국은 한쪽의 주장을 하게될 것이고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사건을 바꾸고 색다른 표현을 하여도 본질은 같은 것이다.
이걸 알면 깨닫고 모르면 세상에 누가 것이다.
헤겔의 정반합이 인간의 한계상황을 말한 것도 된다.

지금의 서양철학도 후기 구조주의가 나오고 카오스모스라고 융합도 시도하는데 그래 봐야 껍질만 바꾼 것이고 그게 그거다.
서양의 노릇을 하니 그들이 대단해 보이고 그럴듯해 보이지만 학문이란 다른 것이 있을 없다.
인간은 모두 같고 사는 세계도 그것이 그것이다.
풍속과 사회환경이 달라 다르게 말하는 듯해도
관심사는 같고 욕구도 같다.
결국 인간의 문제일 뿐이다.
다른 것은 다르고 같은 것은 같은지 뻔하지 않나
알면 그러한 것이고 모르면 종속 당한다.

격물은 사물을 접하고 공부하고 하는 것인데
누구처럼 한번에 끝장을 보려 하면 순서가 있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해야 하고
치지는 순간 올라오는 생각이 모든 사물을 뚫고 지나가니
순서는 필요 없고 모두가 하나이다.
그러니 순서가 없고 그저 관통된 깨우침만 있는 것이다.

치지 이후 의성意誠에 이르는 길은 너무 험난하다.
저절로 되고 단번에 의성을 쉽게 생각하지만
중용의 의미가 겹친 것을 어찌 함부로 논하겠나

치지 이면 군자이고 의성이면 현자이다.
치지한 사람이 지금 보이지가 않은데 의성한 사람은 ,,,
   이후는 말도 못한다.

철학적 인식의 한계에서 헤매는 사람에게 의성이나 심정心正을
논하면 서로 한숨이 나올 뿐이다.



6 自天子以至於庶人、壹是皆以脩身爲本。

From the king down to the common people, all must regard the cultivation of the self as the most essential thing.

현일(玄一) 선생 풀이

주자는 순서와 질서를 중시했고 양명은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
질서와 체계가 없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렇게만 되어있는 것도 아니다.

한쪽만 보고 다른 쪽은 외면하면 아쉬움이 남는다.
그들이 자신이 주장한 것만 알고 다른 쪽은 인정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다만 후인들이 자기의 성향에 맞는 것을 위주로 보기 때문이다.

점진적으로 나아가기도 하고 돈오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지금도 말이 많다.
원융사상은 천년 전에 끝났는데 이들은 아직도 한쪽 눈만 고집하는지 모르겠다.

연속과 불연속, 시간과 공간, 수직과 수평, 체계와 체계, 물질과 비물질, 형이상과 형이하,
이理와 사事 어떤것도 한쪽만으로 세상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사람은 자신의 성향에 따라 보는 것이 있고 한계가 너무도 크다.
설명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모두 한쪽을 택할 밖에 없다.
나머지는 자신의 몫이다.
그래서 깨우침도 모두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쩔 없는 한계는 있다.

천년 전이든 천년 후든 결국은 한쪽의 주장을 하게될 것이고,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사건을 바꾸고 색다른 표현을 하여도 본질은 같은 것이다.
이걸 알면 깨닫고 모르면 세상에 누가 것이다.
헤겔의 정반합이 인간의 한계상황을 말한 것도 된다.

지금의 서양철학도 후기 구조주의가 나오고 카오스모스라고 융합도 시도하는데 그래 봐야 껍질만 바꾼 것이고 그게 그거다.
서양의 노릇을 하니 그들이 대단해 보이고 그럴듯해 보이지만 학문이란 다른 것이 있을 없다.
인간은 모두 같고 사는 세계도 그것이 그것이다.
풍속과 사회환경이 달라 다르게 말하는 듯해도 관심사는 같고 욕구도 같다.
결국 인간의 문제일 뿐이다.
다른 것은 다르고 같은 것은 같은지 뻔하지 않나
알면 그러한 것이고 모르면 종속 당한다.

격물은 사물을 접하고 공부하고 하는 것인데 누구처럼 한번에 끝장을 보려 하면 순서가 있고 시간이 필요하다고 해야 하고, 치지는 순간 올라오는 생각이 모든 사물을 뚫고 지나가니
순서는 필요 없고 모두가 하나이다.
그러니 순서가 없고 그저 관통된 깨우침만 있는 것이다.

치지 이후 의성意誠에 이르는 길은 너무 험난하다.
저절로 되고 단번에 의성을 쉽게 생각하지만 중용의 의미가 겹친 것을 어찌 함부로 논하겠나

치지 이면 군자이고 의성이면 현자이다.
치지한 사람이 지금 보이지가 않은데 의성한 사람은 ,,,
  이후는 말도 못한다.

철학적 인식의 한계에서 헤매는 사람에게 의성이나 심정心正을 논하면 서로 한숨이 나올 뿐이다.



7 其本亂而末治者、否矣。其所厚者薄、而其所薄者厚、未之有也。此謂知本、此謂知之至也。
It is impossible to have a situation wherein the essentials are in disorder, and the externals are well-managed. You simply cannot take the essential things as superficial, and the superficial things as essential. This is called, “Knowing the root.” This is called “The extension of knowle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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