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 29일 월요일

양직공도(梁職貢圖)속의 백제국사(百濟國使) 제기(題記)

『양직공도 梁職貢圖』해제


분류 : 잡사류
편저자 : 양 원제 梁 元帝
시기 : 526~539년 사이


『양직공도』는 중국 남경 南京 박물관에 소장된 한 장의 직공도 職貢圖(또는 사신도 使臣圖)를 가리키는 것으로, 중국에 입조入朝한 백제국 百濟國을 비롯한 12명의 각 국 사신들의 모습을 그리고 각 사신의 형상 뒤에 그 나라의 상황과 역대 중국과의 교류에 대한 간단한 제기 題記가 있는 형태이다.


『양직공도』는 각 국 사신들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당시 중국 주변 제국 사람들의 용모와 복식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회화 사료이며, 또한 『양서 梁書』 제이전 諸夷傳에 나오지 않는 내용도 제기에 기록됨으로써 당시 중국 주변 각국의 역사를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문자 사료이기도 한데, 우리나라 역사와 관련해서는 사료가 적은 백제사를 연구하는 데 귀중한 사료라고 할 수 있다.


백제국 제기 百濟國題記는 193자에 불과한 내용이지만, 백제의 역사, 중국과의 교통, 고구려와의 관계, 정치 제도, 주변 지역에 대한 서술, 언어, 풍속 등 다양한 내용을 담고 있다.


양직공도에 백제 사신의 모습은 발을 약간 왼편을 향하여 나란히 하고 있다. 단아한 용모에 관(冠)을 쓰는 좌임(左扉)의 대수포(大袖袍)를 무릎을 약간 덮을 정도로 착용하고 그 아래에 바지를 입었으며, 검은 신을 신고 양손은 모은 채 가리고 있다. 백제의 복식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둘도 없이 소중한 자료이며, 특히 삼국시대 백제 사신의 모습과 이에 대한 기술은 다른 곳에서 찾아볼 수 없는 귀중한 자료이다.
 
百濟舊來夷馬韓之屬晉末來駒驪略有遼東樂浪亦有遼西晉平縣自晋已來常修蕃貢, 義熙中, 其王餘腆, 宋元嘉中其王餘毗, 齊永明中其王餘太, 皆受中國官爵,

梁初以太 除征東將軍, 尋爲高句驪所破, 普通二年, 其王餘隆 遣使奉表云, 累破高麗,

號所治城曰固麻, 謂邑檐魯 於中國郡縣 有二十二檐魯, 分子弟宗族爲之. 旁小國有 叛波, 卓, 多羅, 前羅, 斯羅, 止迷, 麻連, 上己文, 下枕羅等附之.

言語衣服略同高麗, 行不張拱 拜不申足, 以帽爲冠, 襦曰複袗, 袴曰褌. 其言參諸夏, 亦秦韓之遺俗.



백제는 옛 래이로 마한의 무리다. 진나라 말기에 고구려가 일찌기 요동과 낙랑을 경략하고, (백제) 역시 요서와 진평현에 있었다. 진나라 이래로 백제는 번공(蕃貢)으로 항상 수교를 하고 통하였다. 의희 연간(405-418)에 부여전(전지왕), 송 원가(424-453)에는 부여비(비류왕), 제 영명(483-493)에 부여태(동성왕) 모두 중국의 관작을 받았다.

양나라 초에 부여태(동성왕)가 정동장군을 제수 받았다. 얼마 뒤 고구려를 격파했다. 보통 2년(521년)에 부여융(무녕왕)이 사신을 파견하여 표문을 올려 여러 번 고구려를 무찔렀다고 했다.

백제는 도성을 고마라 하고 읍을 담로라 하는데 이는 중국의 군현과 같은 말이다. 그 나라에는 22담로가 있는데, 모두 왕의 자제와 종족에게 나누어 다스리게 했다. 주변의 소국으로는 반파, 탁, 다라, 전라, 사라(신라), 지미, 마연, 상기문, 하침라 등이 부속되어 있다.

언어와 의복은 고구려와 거의 같지만, 걸을 때 두 팔을 벌리지 않는 것과 절할 때 한 쪽 다리를 펴지 않는다. 모자를 관이라 부르고, 저고리를 복삼, 바지를 곤이라 한다. 언어에는 하나라의 말이 뒤섞여 있으니, 이것 또한 진한의 습속이 남은 때문이라고 한다.



2010년 11월 28일 일요일

일본왕의 상징 삼종신기 三種神器




일본 창조신화를 보면 태양의 신 아마테라스오오카미는 자신의 손자 호노니니기에게 인간세상으로 내려가 그 곳에서 인간을 다스리라며 옥구슬, 거울, 3가지의 보물, 이른바 삼종신기를 주며 인간세계로 내려 보낸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자손이 천황天皇이며 만세일계(영원히 한 혈통으로 이어진다.)가 된다는 것인데, ‘인간이면서 신’이라고 불린다.
원래 천황이 이렇게 존귀한 존재가 된 것은 아닌데, 이는 일본의 수도를 나라로 옮기며 천무천황天武天皇이 대왕이라 불리던 자신의 칭호를 천황으로 바꾸며, 자신의 왕권과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일본서기와 고사기를 짓게 만들고 자신과 자신의 가문을 신의 가문으로 둔갑시킨 것이다.


2010년 11월 27일 토요일

평양 인근 출토 신금석문(新金石文)

  

  


1930년대 평양 인근에서 출토된 것을 한 개인이 소장해온 유물로, 네모 모양의 점토판 표면에 290여자의 글씨를 새긴 후 구리 가루를 홈에 채워 넣고 불에 구운 것으로, 벽에 걸 수 있도록 구멍을 뚫어 놓았다. 아래는 비문의 초역이다. 
 

 
< 碑文 1 > ‘始七年十月’ 흙으로 구운 네모판 비(碑) (‘始七年十月’銘 塑造四角板碑)
 
- 흙으로 구워 만든 네모판(四角板)에 새긴 글(모두 134자)
- 크기 : 가로 25㎝, 세로 26㎝, 두께 2.3㎝
- 위쪽에 벽에 거는 구멍이 2개 있는데 왼쪽 것은 깨지고, 오른쪽 것은 못이 남아있다.
 
 
正始武侵宮百殊固諫慾還亡命
存其固都誠不耐城遣訖繼創邑都
護殊百位麓酋(委+台)七年十月繼明王
寧東國吏玄菟沸流安泰天歲
禮樂世百濟高麗殊代天府祖鄒牟
王以城民之意秋八月步騎二千戰
儉혁(赤+見)峴岭攻數千里降士數千國宮
前臣高伏儉城北王盲記天地之
中銘存永世隨登愿此碑永立以
傳百世紹示百殊城民
 
 
正始武侵 宮百殊固諫 慾鎩
정시 연간에 병란이 있었다. 궁(宮) 백수(百殊)가 간곡히 간(諫)하였으나 죽이려한 일이 있었다.
 
還亡命 存其固都 誠不耐城
망명에서 돌아와 옛 수도를 보존하고 불내성을 튼튼하게 하였으며,

遣訖繼 創邑都 護殊百位麓酋
흘계(訖繼)를 보내 도읍을 만들고 수(殊) 백위(百位) 녹추(麓酋)를 통솔하였다.
 
委+台(始?)七年 十月 繼明王 封护寧東國 吏玄菟沸流
始 7년 10월 명철한 왕을 이어 영동국을 봉해 개척하고, 현토와 비류를 다스리니,
 
安泰天歲禮樂世百濟高麗
평안하고 태평한 세월과 예악이 百濟와 高麗에 이어졌다.
 
殊代天府祖鄒牟王 以城民之意
수(殊)는 천부와 조상인 추모왕과 성민(城民)의 뜻을 대신하였다.
 
秋八月 步騎二千 戰儉 혁(赤+見)峴岭 攻數千里 降士數千
가을 8월 보병과 기병 2000으로 혁현령에서 검과 맞붙어 싸웠다. 수 천리를 쳐서 수 천명의 적병을 굴복시켰다.
 
國宮前臣高伏 儉鎩(?)城北 王盲
國宮 前臣 고(高)가 굴복하자 검이 성 북쪽을 뚫었고(잘라냈다), 왕이 눈이 멀었다. (?)
 
記天地之中 銘存永世隨登
천지간에 기록하고 영세토록 새겨 보존하니 隨登(?),
 
愿此碑永立 以傳百世 紹示百殊城民
이 비는 영원히 백세에 전해 백수(百殊) 성민(城民)에게 이어지기 바라노라.


 
 < 碑文 2 > ‘正始七年’ 흙으로 구운 네모판 비(碑) (正始七年’銘 塑造四角板碑)
 
- 흙으로 구워 만든 네모판(四角板)에 새긴 글(모두 50자)
- 크기 : 가로 17㎝, 세로 24.8㎝, 두께 2㎝
- 벽에 거는 구멍이 위쪽에 2개 있다.

正始武止宮不從固諫食蒿而
死殊還亡命慾鎩存其固都將
誠不耐城往丸都遣訖繼造邑
都護位殊麓酋魏正始七年
百殊宣
 
正始武止 宮不從固諫 食蒿而死
정시 연간의 병란이 끝났다. 궁이 간곡히 간하는 것을 듣지 않자 쑥만 먹고 죽은 일이 있었다.
 
殊還亡命 慾鎩 存其固都 將誠不耐城
수가 망명에서 돌아와 (慾鎩?) 옛 수도를 보존하고 불내성을 튼튼히 하고자 하였으며,
 
往丸都 遣訖繼 造邑都 護位殊麓酋
환도(丸都)에 가서 흘계(訖繼)를 보내 도읍을 만들고 위(位) 수(殊) 녹추(麓酋)를 통솔하였다.

魏正始七年 百殊宣
위(魏) 정시(正始) 7년 백수(百殊)가 선포하노라
 
 

< 碑文 3 > ‘遂成王10年’ 흙으로 구운 여덟모기둥 비(碑) (‘遂成王10年’銘 塑造八角柱碑)
 
- 흙으로 구워 만든 여덟모기둥(八角柱)에 새긴 글(86자)
- 밑바닥 지름 13×12.5㎝, 윗면 지름 9×8㎝, 높이 20.5㎝
 
 
始祖之孫日月之子承故夫余
故邑遂成王十年東西南北殊
 
繼明帝逐多寧東百殊
司吏玄菟定邑都沸流安
 
久泰長歲禮樂以百濟高句
麗殊代天府繼祖鄒牟王意
 
民泰國安百殊心意□□
年功建國都玄菟郡紒継
 

始祖之孫 日月之子 承故夫餘 故邑
시조의 후손, 해와 달의 아들이 옛 부여와 옛 땅을 이어받았다.
 
遂成王十年 東西南北殊 繼明帝 逐多拓寧東
수성왕 10년 동서남북의 수(殊)가 명제(明帝)를 이어 영동(寧東)을 몰아내고 개척하였다.
 
百殊司吏玄菟 定邑都沸流
백수가 현토를 다스리고 비류에 도읍을 정하니
 
安久泰長歲禮樂以百濟高句麗
평안과 태평세월, 예악이 백제와 고구려에 미쳤다.
 
殊代天府 繼祖鄒牟王意 民泰國安
수(殊)가 천부를 대신하고 시조 추모왕의 뜻을 이어 백성을 태평하게 하고 나라를 안정시켰고.
 
百殊心意□ 年功 建國都 玄菟郡紒継
백수가 마음과 뜻□□ 년 공을 들여 국도를 건설하고 현토군을 넘겨 받았다.


2010년 11월 26일 금요일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


(甲)寅年正月九日奈祗城砂宅智積


慷身日之易往慨體月之難還穿金


以建珍堂鑿玉以立寶塔巍巍慈容


吐神光以送雲峨峨悲貌含聖朗以




[해제: 이용수]


"(갑)인년 정월 9일, 내지성의 사택지적은 나날이 몸이 쉬이 감(나빠짐)[불교 '이왕': 아미타의 본원에 의하여 극락에 쉽게 왕생하는 일?]을 슬퍼하고 다달이 몸이 돌아오기 어려움을 슬퍼하며 금을 뚫어 진귀한 당을 짓고 옥을 깎아 보배로운 탑을 세웠다.


높고 큰 자애로운 모습은 구름을 쫒아 신령한 빛을 토하고 높고 높은 은혜로운 자태는 ...함으로써 성스러운 밝음을 머금었다."


사택지적은 백제의 8대 귀족가문의 하나인 사택씨砂宅氏(사씨) 출신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 황극기 원년(642) 조에 의하면 그는 대좌평大佐平으로서 왜(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기록되어 있다. '대좌평'이라는 최고위 관등을 지니고 활동하였으나, 의자왕 14년(654)에 정계에서 밀려났다.


사택지적은 스스로를 내기성奈祇城(내지성?) 사람이라고 하였다. 종래에는 사택지적이 정계에서 물러나 부여가 아닌 내기성으로 은퇴하였다고 보는 설이 있었다. 하지만, 이 비석이 내기성 지역이 아니라 부여 읍내에서 발견된 점으로 보아, 내기성은 사택지적의 출신지를 뜻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내기성에 대해서는 부여 은산恩山을 가리킨다는 설과, 부여 가까이의 매라邁羅지역을 가리킨다는 설이 있다. 사법명沙法名에게 ‘행정로장군매라왕行征虜將軍邁羅王이라는 작호가 주어진 것이 있고, 또 부여 가까이의 궁남지宮南池에서 출토된 목간에 매라의 지명이 들어 있는 것에 근거하여 그렇게 설명하는 것이다. 사택씨 즉 사씨들은 부여인 사泗에서 활동하였다. 사택지적도 정계에서 물러나기는 하였으나, 부여 안의 저택에 거쳐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매우 강한 불교적 색채가 느껴진다.


2010년 11월 23일 화요일

전쟁은 40대 이상만 가라

'전쟁은 전부 40대 이상의 사람만 가라. 나이 먹은 사람들이 자기들은 전쟁에 안 가니까 쉽게 결정해서 젊은 사람들을 죽게 만든다. 그러니까 나이 먹은 사람들이 전쟁에 나가서 죽든 살든지 해야 한다.'

- 찰리 채플린 -

야사野史에 보이는 박엽과 청태조 누루하치

박엽朴燁은 조선 오백년을 통하여 가장 출중한 문무겸전의 영걸이었고, 팔도의 재사才士, 술객術客, 장사壯士들이 모두 그에게로 운집雲集하였다. 조선조의 문관으로 1570년(선조3년)에 태어나 1623년(인조1년)에 졸卒하였다. 자子는 숙야叔夜, 호는 국창菊窓, 본관은 반남이다. 1597년 선조30년에 문과에 급제, 내외직을 역임하여 가는 곳마다 치적을 올렸다. 함경남도병사가 되어 성지城池를 수축하여 북서의 방비를 공고히 했고 황해도병사를 거쳐 평안도 관찰사가 되어 6년 동안에 치적이 나타나서 명성이 높았다. 북쪽 오랑캐들의 동정을 잘 알고 방비하였으므로 그들의 감히 연변沿邊을 침범하지 못하였다. 당대의 권신 이이첨을 모욕하고도 무사하리만큼 명성을 떨쳤다. 인조반정후 그의 부인이 광해군의 인척이었다는 이유로 그를 두려워하는 훈신들에게 모함을 받아 사형 당하였다. 숙야는 기운이 절륜하여 6, 7세에 이미 그 오줌줄기가 담장을 넘었다고 하니 가히 그의 정력을 짐작할 수 있을 만 하다.
그가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의 일이다. 매일 밤 초저녁이면 감영을 떠났다가 새벽녘에야 돌아오는 일이 자주 있었다. 하루는 그의 첩 소백주가 참다 못하여 한마디 참견을 하였다.
「무슨 재미가 그토록 진진하여 밤새는 줄도 모르고 계시오니까?」
「그게 무슨 소리인고?」
「그렇지 않으시다면 어인 일로 밤마다 출입이 그토록 늦기까지 하시겠습니까?」

숙야는 사랑하는 첩의 영문을 모르고 하는 말에 그저 빙그레 웃으면서 답하는 말이
「아녀자가 참견할 바가 아니니라, 긴한 일이 있어 며칠 늦은 것이니 그리알라」하고 달랬으나 소백주는 물러나지 않고 응석부리듯이
「그토록 재미있는 일이라면 소첩도 한번 데려가 주시겠습니까?」하고 보채었다.

숙야는 엄숙한 안색을 하면서도 그날 밤 소백주를 말에 태우고 질풍같이 어둠속을 달렸다. 어찌나 빨리 달리는지 뒤에 탄 소백주의 눈에는 먼곳의 불빛과 귓전의 바람소리만 들릴 뿐이어서 어디를 얼마나 가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였다. 한참이나 달리고 난 후에 숙야는 말을 서서히 멈추어 낮은 소리로
「예가 만주 안동 땅이다. 내 지금부터 하는 일을 너는 예서 조용히 숨어 구경이나 하여라」고 일렀다.

숙야는 곧 청태조 ‘누루하치’의 군영을 찾았다. ‘누루하치’가 조선을 도모코저 안동까지 진출하여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숙야장군 단 한사람의 위력에 눌려 오지도 가지도 못하고 있는 판이었다. 숙야는 거침없이 ‘누루하치’에게 말하였다.
「자 오늘은 최후 결판이다. 다시 또 무슨 군말이 있다면 너 “누루하치”도 대장부가 아니니라」

여러날 밤, 두 사람이 재주를 겨루어 왔던 것이다. 게다가 “누루하치”는 재주가 밀릴 때 마다 이러니 저러니 구실을 붙여 다시 대결하기를 청했던 것이다. “누루하치”도 더는 염치없어 오늘밤을 결판의 날로 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말없이 대결하였으나 내리치고 찌르는 한수 한수는 온갖 비법과 운신의 정력을 기울인 필살의 일창一槍과 일검一劍이었다. 처음에는 말을 타고 겨루던 두 사람이 나중에는 창칼만 번쩍일 뿐 사람은 보이지 않고 용호상쟁하는 신묘神妙를 다하는 기량의 대결이라 숨어 보던 소백주는 숨이 막힐 듯 하였다. 부질없는 아녀자의 질투로 사랑하는 이를 잃는가 걱정도 되었겠지만 한편 자신이 모시는 어른이 저토록 훌륭한 분인 것을 어찌 감히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다만 침을 삼키고 숨을 죽이고 바라볼 뿐이었다.
한참만에야 호령하는 숙야장군의 말소리가 우렁차게 들리었다.
「자 이젠 어쩔텐가? 그래도 감불생심敢不生心 이 나라를 넘보겠는가?」 땅에 떨어진 “누루하치”의 목에 칼을 겨누고 하는 일갈이다.
「알았소이다 이제 다시는....」“누루하치”는 끝을 맺지 못하였다.

그 또한 장정 만 명이 당해내지 못할 용맹을 자랑하던 장군일 뿐 아니라 수년을 계획한 대사大事를 말 한마디 못하고 포기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 허탈감은 어떠했으랴. 결국 “청태조 누루하치”는 전군을 이끌고 회군하였다. 한 번의 접전도 해보지 못하고 패전한 것이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회군하던 청군은 캄캄한 칠야에 진퇴유곡에 빠지고 말았다. 분명 어제까지 훤하게 나있던 길은 간데 없고 앞에는 층암절벽에 그 밑에는 퍼런 강물이 출렁이고 있으며 뒤에는 천군만마를 거느린 대장군 숙야가 버티고 서있는 것이 아닌가? “누루하치”는 고개를 떨구고 숙야 앞에 섰다.
「회군하라 하시면 길이라도 열어주시기를...」 숙야는 말없이 손짓하였다.
「어서 가보아라」

청의 대군은 소리없이 회군하고 말았다. 이제는 절벽도, 강물도 이미 다 사라지고 없었다. 그후 청군의 군사들은 숙야장군을 군신軍神처럼 우러러 보았다 한다. 이와같은 비범한 술수는 어디에서 누구에게 배웠던가? 그는 어려서부터 타고난 절륜의 정력을 살려 스승 송구봉선생을 따라 단학의 좌우양도를 아울러 닦은 분이다. 또한 그 계제가 상당히 고계高階에까지 올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뒷날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왕위에서 물러났을 때 바로 그날 한 사람의 부장副將이 나타나 숙야장군께 아뢰기를
「소장 문안드립니다. 」
「그대가 웬일인고」
「나라에는 반정이 있었습니다」
「 나도 알고 있느니라」
「 장군은 장차 어찌하시렵니까? 소장이 세 가지의 계책을 아뢰올까 하옵는데 들어주시렵니까?」 숙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러면 아뢰겠습니다. 이제 대감이 거느리는 휘하의 십만군졸을 휘몰아 중원을 들이치신다면 천하는 가히 뉘 손에 넘어갈지 알 수 없는 일이니 한번 꾀할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상책이올시다. 다음은 청인淸人과 힘을 합하여 천하의 일을 꾀하신다면 천하는 비록 양분이 될지언정 더욱 확고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중책이올시다.」

그러나 숙야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마치 명상에 잠긴 듯 눈을 감은 채 말이 없는 것이다. 부장은 말을 이었다.
「그러면 마지막 하책을 아뢰겠습니다. 평양의 군졸을 이끌고 주야로 길을 달려서 서울로 향하신다면 전왕前王을 다시 뫼시는데 3일 까지야 걸리겠습니까?」 숙야는 조용히 눈을 떴다.
「부당한 일이다. 혼군(광해군을 지칭)이 아니시드냐? 수많은 백성이 도탄에 빠지는 줄 알면서 어찌 홀로 나만의 안녕과 영달을 위하여.....」그는 말을 잇지 않았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른다면 그의 말대로 준마 비껴타고 천군만마를 호령하여 한번 천하를 도모해보고 싶기도 하지만 이제 민족의 운은 쇠하여 대륙의 한귀에 몰리고 그 체통마저 이어가기 어려운 형편이 아닌가? 너무나 훤히 내다보이는 앞날이었다.
「물러가거라」
「하오면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시렵니까?」그는 말없이 눈을 감았다.

과연 그 후 곧 어명에 의하여 숙야장군은 사형되었고 휘하 몇몇 장사들은 편협한 조정의 처사에 반발하여 청나라로 망명하였다. 그때 계책을 올리던 부장이 바로 후일 청나라의 용골대이다. 숙야장군없는 조선은 텅빈 성곽과도 같았다. 역시 박엽의 수하부장중의 하나였던 임경업장군의 용맹도 청군의 지략과 무력앞에는 속수무책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