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 23일 화요일

야사野史에 보이는 박엽과 청태조 누루하치

박엽朴燁은 조선 오백년을 통하여 가장 출중한 문무겸전의 영걸이었고, 팔도의 재사才士, 술객術客, 장사壯士들이 모두 그에게로 운집雲集하였다. 조선조의 문관으로 1570년(선조3년)에 태어나 1623년(인조1년)에 졸卒하였다. 자子는 숙야叔夜, 호는 국창菊窓, 본관은 반남이다. 1597년 선조30년에 문과에 급제, 내외직을 역임하여 가는 곳마다 치적을 올렸다. 함경남도병사가 되어 성지城池를 수축하여 북서의 방비를 공고히 했고 황해도병사를 거쳐 평안도 관찰사가 되어 6년 동안에 치적이 나타나서 명성이 높았다. 북쪽 오랑캐들의 동정을 잘 알고 방비하였으므로 그들의 감히 연변沿邊을 침범하지 못하였다. 당대의 권신 이이첨을 모욕하고도 무사하리만큼 명성을 떨쳤다. 인조반정후 그의 부인이 광해군의 인척이었다는 이유로 그를 두려워하는 훈신들에게 모함을 받아 사형 당하였다. 숙야는 기운이 절륜하여 6, 7세에 이미 그 오줌줄기가 담장을 넘었다고 하니 가히 그의 정력을 짐작할 수 있을 만 하다.
그가 평안도 관찰사로 있을 때의 일이다. 매일 밤 초저녁이면 감영을 떠났다가 새벽녘에야 돌아오는 일이 자주 있었다. 하루는 그의 첩 소백주가 참다 못하여 한마디 참견을 하였다.
「무슨 재미가 그토록 진진하여 밤새는 줄도 모르고 계시오니까?」
「그게 무슨 소리인고?」
「그렇지 않으시다면 어인 일로 밤마다 출입이 그토록 늦기까지 하시겠습니까?」

숙야는 사랑하는 첩의 영문을 모르고 하는 말에 그저 빙그레 웃으면서 답하는 말이
「아녀자가 참견할 바가 아니니라, 긴한 일이 있어 며칠 늦은 것이니 그리알라」하고 달랬으나 소백주는 물러나지 않고 응석부리듯이
「그토록 재미있는 일이라면 소첩도 한번 데려가 주시겠습니까?」하고 보채었다.

숙야는 엄숙한 안색을 하면서도 그날 밤 소백주를 말에 태우고 질풍같이 어둠속을 달렸다. 어찌나 빨리 달리는지 뒤에 탄 소백주의 눈에는 먼곳의 불빛과 귓전의 바람소리만 들릴 뿐이어서 어디를 얼마나 가고 있는지를 알지 못하였다. 한참이나 달리고 난 후에 숙야는 말을 서서히 멈추어 낮은 소리로
「예가 만주 안동 땅이다. 내 지금부터 하는 일을 너는 예서 조용히 숨어 구경이나 하여라」고 일렀다.

숙야는 곧 청태조 ‘누루하치’의 군영을 찾았다. ‘누루하치’가 조선을 도모코저 안동까지 진출하여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숙야장군 단 한사람의 위력에 눌려 오지도 가지도 못하고 있는 판이었다. 숙야는 거침없이 ‘누루하치’에게 말하였다.
「자 오늘은 최후 결판이다. 다시 또 무슨 군말이 있다면 너 “누루하치”도 대장부가 아니니라」

여러날 밤, 두 사람이 재주를 겨루어 왔던 것이다. 게다가 “누루하치”는 재주가 밀릴 때 마다 이러니 저러니 구실을 붙여 다시 대결하기를 청했던 것이다. “누루하치”도 더는 염치없어 오늘밤을 결판의 날로 할 것을 다짐하였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말없이 대결하였으나 내리치고 찌르는 한수 한수는 온갖 비법과 운신의 정력을 기울인 필살의 일창一槍과 일검一劍이었다. 처음에는 말을 타고 겨루던 두 사람이 나중에는 창칼만 번쩍일 뿐 사람은 보이지 않고 용호상쟁하는 신묘神妙를 다하는 기량의 대결이라 숨어 보던 소백주는 숨이 막힐 듯 하였다. 부질없는 아녀자의 질투로 사랑하는 이를 잃는가 걱정도 되었겠지만 한편 자신이 모시는 어른이 저토록 훌륭한 분인 것을 어찌 감히 생각이나 하였겠는가, 다만 침을 삼키고 숨을 죽이고 바라볼 뿐이었다.
한참만에야 호령하는 숙야장군의 말소리가 우렁차게 들리었다.
「자 이젠 어쩔텐가? 그래도 감불생심敢不生心 이 나라를 넘보겠는가?」 땅에 떨어진 “누루하치”의 목에 칼을 겨누고 하는 일갈이다.
「알았소이다 이제 다시는....」“누루하치”는 끝을 맺지 못하였다.

그 또한 장정 만 명이 당해내지 못할 용맹을 자랑하던 장군일 뿐 아니라 수년을 계획한 대사大事를 말 한마디 못하고 포기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 허탈감은 어떠했으랴. 결국 “청태조 누루하치”는 전군을 이끌고 회군하였다. 한 번의 접전도 해보지 못하고 패전한 것이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회군하던 청군은 캄캄한 칠야에 진퇴유곡에 빠지고 말았다. 분명 어제까지 훤하게 나있던 길은 간데 없고 앞에는 층암절벽에 그 밑에는 퍼런 강물이 출렁이고 있으며 뒤에는 천군만마를 거느린 대장군 숙야가 버티고 서있는 것이 아닌가? “누루하치”는 고개를 떨구고 숙야 앞에 섰다.
「회군하라 하시면 길이라도 열어주시기를...」 숙야는 말없이 손짓하였다.
「어서 가보아라」

청의 대군은 소리없이 회군하고 말았다. 이제는 절벽도, 강물도 이미 다 사라지고 없었다. 그후 청군의 군사들은 숙야장군을 군신軍神처럼 우러러 보았다 한다. 이와같은 비범한 술수는 어디에서 누구에게 배웠던가? 그는 어려서부터 타고난 절륜의 정력을 살려 스승 송구봉선생을 따라 단학의 좌우양도를 아울러 닦은 분이다. 또한 그 계제가 상당히 고계高階에까지 올랐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뒷날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왕위에서 물러났을 때 바로 그날 한 사람의 부장副將이 나타나 숙야장군께 아뢰기를
「소장 문안드립니다. 」
「그대가 웬일인고」
「나라에는 반정이 있었습니다」
「 나도 알고 있느니라」
「 장군은 장차 어찌하시렵니까? 소장이 세 가지의 계책을 아뢰올까 하옵는데 들어주시렵니까?」 숙야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러면 아뢰겠습니다. 이제 대감이 거느리는 휘하의 십만군졸을 휘몰아 중원을 들이치신다면 천하는 가히 뉘 손에 넘어갈지 알 수 없는 일이니 한번 꾀할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이 상책이올시다. 다음은 청인淸人과 힘을 합하여 천하의 일을 꾀하신다면 천하는 비록 양분이 될지언정 더욱 확고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바로 중책이올시다.」

그러나 숙야는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마치 명상에 잠긴 듯 눈을 감은 채 말이 없는 것이다. 부장은 말을 이었다.
「그러면 마지막 하책을 아뢰겠습니다. 평양의 군졸을 이끌고 주야로 길을 달려서 서울로 향하신다면 전왕前王을 다시 뫼시는데 3일 까지야 걸리겠습니까?」 숙야는 조용히 눈을 떴다.
「부당한 일이다. 혼군(광해군을 지칭)이 아니시드냐? 수많은 백성이 도탄에 빠지는 줄 알면서 어찌 홀로 나만의 안녕과 영달을 위하여.....」그는 말을 잇지 않았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른다면 그의 말대로 준마 비껴타고 천군만마를 호령하여 한번 천하를 도모해보고 싶기도 하지만 이제 민족의 운은 쇠하여 대륙의 한귀에 몰리고 그 체통마저 이어가기 어려운 형편이 아닌가? 너무나 훤히 내다보이는 앞날이었다.
「물러가거라」
「하오면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시렵니까?」그는 말없이 눈을 감았다.

과연 그 후 곧 어명에 의하여 숙야장군은 사형되었고 휘하 몇몇 장사들은 편협한 조정의 처사에 반발하여 청나라로 망명하였다. 그때 계책을 올리던 부장이 바로 후일 청나라의 용골대이다. 숙야장군없는 조선은 텅빈 성곽과도 같았다. 역시 박엽의 수하부장중의 하나였던 임경업장군의 용맹도 청군의 지략과 무력앞에는 속수무책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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