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1월 26일 금요일

사택지적비(砂宅智積碑)


(甲)寅年正月九日奈祗城砂宅智積


慷身日之易往慨體月之難還穿金


以建珍堂鑿玉以立寶塔巍巍慈容


吐神光以送雲峨峨悲貌含聖朗以




[해제: 이용수]


"(갑)인년 정월 9일, 내지성의 사택지적은 나날이 몸이 쉬이 감(나빠짐)[불교 '이왕': 아미타의 본원에 의하여 극락에 쉽게 왕생하는 일?]을 슬퍼하고 다달이 몸이 돌아오기 어려움을 슬퍼하며 금을 뚫어 진귀한 당을 짓고 옥을 깎아 보배로운 탑을 세웠다.


높고 큰 자애로운 모습은 구름을 쫒아 신령한 빛을 토하고 높고 높은 은혜로운 자태는 ...함으로써 성스러운 밝음을 머금었다."


사택지적은 백제의 8대 귀족가문의 하나인 사택씨砂宅氏(사씨) 출신이다. 『일본서기日本書紀』 황극기 원년(642) 조에 의하면 그는 대좌평大佐平으로서 왜(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왔다 기록되어 있다. '대좌평'이라는 최고위 관등을 지니고 활동하였으나, 의자왕 14년(654)에 정계에서 밀려났다.


사택지적은 스스로를 내기성奈祇城(내지성?) 사람이라고 하였다. 종래에는 사택지적이 정계에서 물러나 부여가 아닌 내기성으로 은퇴하였다고 보는 설이 있었다. 하지만, 이 비석이 내기성 지역이 아니라 부여 읍내에서 발견된 점으로 보아, 내기성은 사택지적의 출신지를 뜻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내기성에 대해서는 부여 은산恩山을 가리킨다는 설과, 부여 가까이의 매라邁羅지역을 가리킨다는 설이 있다. 사법명沙法名에게 ‘행정로장군매라왕行征虜將軍邁羅王이라는 작호가 주어진 것이 있고, 또 부여 가까이의 궁남지宮南池에서 출토된 목간에 매라의 지명이 들어 있는 것에 근거하여 그렇게 설명하는 것이다. 사택씨 즉 사씨들은 부여인 사泗에서 활동하였다. 사택지적도 정계에서 물러나기는 하였으나, 부여 안의 저택에 거쳐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매우 강한 불교적 색채가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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