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19일 일요일

『동야휘집』에 기술된 박엽朴燁

숙야는 장수로서의 지략이 있어 천문과 지리병학과 술수에 모두 능통하였다젊을 적에는 또래 청년들과 잘 어울려 놀았다하루는 청년들이 어떤 집에 모여 있는데뜰 안에 갑자기 바깥에서 더운 물이 지붕을 넘어 날아 들어와 의관에 쏟아졌다청년들이 놀라고 괴이하게 여겨, "필시 박 숙야가 온 게로다." 하고 나가 본 즉엽이 행랑채 바깥 길에 서서 지붕 위로 오줌을 갈기고 있었다.
  엽의 외가가 충청도 목천 고을에 있어 서울과는 이백 리 남짓 떨어져 있었다소매 속에다 밥 한 그릇을 넣고 느지막이 소매를 저으며 길을 떠나면날이 채 저물기도 전에 당도하였다그 길 가는 모습이 빠르지도 않고 느리지도 않아 다른 행인들과 다른 점이 없었으나 다만 바람결에 옷자락 스치는 소리가 날 따름이었다
  郡邑 다스림에 미쳐서는 위엄과 명령이 몹시 높아서 관청 일이 그 자리에서 결정되고광해군(李琿, 1575-1641)의 동서로서 관서(평안도)백이 된지 10년에 위엄이 온 도에 떨쳤고북쪽 오랑캐도 또한 그를 두려워하여 감히 국경을 넘어오지 못하였다일찍이 막비(裨將)를 불러 술과 안주를 주면서 말하기를 “너는 이것을 가지고 중화 구현으로 가서 기다리고 있으면 반드시 두 사람의 건장한 사나이가 채찍질하며 말을 타고 지나갈 것이니 내 말로 전하기를 ‘너희들이 우리나라에 왕래하는 것을 아무도 모르는 줄 알지만 나는 이미 알고 있다행역이 참으로 괴롭겠기로 술과 안주를 보내는 것이니 취하게 마시고 속히 돌아가도록 하라 ’고 하라.” 幕客(막비)이 즉시 가서 기다리자 과연 두 사람이 지나므로 엽의 말로 전하니 두 사람이 서로 돌아보면서 실색하여 말하기를 “장군은 신인이로다우리들이 어찌 감히 다시 오리오.” 하고는 술을 마시고 사라지니 이들은 곧 용골대와 마부대로 몰래 우리나라에 잠입하여 허실을 정탐함이었는데 박엽만이 그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또 한 번은 총애하는 기생에게 이르기를, "오늘 밤에 네가 나를 따라가서 좋은 구경거리 하나를 보겠느냐"하니 기생이 쾌히 응낙하였다밤이 되자 엽이 검푸른 노새에 타더니 앞에다 기생을 태우고 주단으로 자기 몸에다 기생의 허리를 묶었다눈을 뜨지 말라고 주의를 주고는 채찍을 휘둘러 쏜살같이 달리니 두 귀에 바람소리만 들릴 뿐이었다한 곳에 이르러 눈을 떠서 보라 하는데서리가 덮인 광막한 큰 들판에 달빛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고군영 막사는 하늘에까지 잇닿아 있었고 등불이 휘황하게 빛났다이에 기생에게 장막 속에 숨어 있으라 하고 엽이 의자에 혼자 꼿꼿이 앉아 있으려니,잠시 후 징 소리가 나면서 몇 리에 걸쳐 철기가 성난 파도처럼 길게 줄을 지어 몰려 왔다대열을 벌이어 진형을 갖추고는 두 패로 갈리어 용력을 과시함이러니 가운데 있는 한 장수는 팔 척이나 되는 키에 머리엔 푸른 깃을 꽂은 붉은 투구를 쓰고 몸엔 용무늬 갑옷과 검은 상의를 입고 있었으며 손에는 별 무늬가 새겨진 보검을 잡고 있었다그 자가 장막을 헤치고 들어오더니 웃으면서 말하기를, "네가 과연 왔구나오늘밤에 먼저 검술을 시험하여 자웅을 가리는 게 좋겠다." 하자 엽이, "좋다."고 응수했다이에 칼을 짚고 의자에서 내려 와 들판 위에 마주 보고 서서는 둘 다 공격하는 자세를 취했다얼마 뒤 두 사람은 한 줄기 흰 무지개로 변하여 구름 덮인 하늘로 솟구쳐 들어갔는데단지 공중에서 서로 칼 부딪는 소리만이 들려 왔으며 가끔 붉은 번갯불이 번쩍이더니마침내 그 장수가 땅에 떨어져 고꾸라지자 엽이 이내 공중에서 날아 내려와 오랑캐 장수의 가슴통에 걸터앉더니, "어떤가하고 소리쳤다그러자 그는, "장군의 신이한 용력을 만 명이라도 당해내지 못할 것을 오늘 더욱 잘 알게 되었소이다.어찌 다시 장군과 우열을 다투겠소."라고 대답했다엽이 웃으며 일어나 같이 장막 안에 들어가 서로 술잔을 들어 권하고선 각자 몇 잔을 취토록 마시고 나더니그 장수는 작별을 고하고 떠났다그러나 일  못 가서 갑자기 대포 소리가 한 방 울리자 포연과 화염이 하늘에까지 뻗치더니 저들 한 부대의 떼 지어 있던 병사와 말들이 운무 속으로 말리어 들어가고 땅 위에 있던 자들도 역시 모조리 풍비박산(바람처럼 날리고 우박처럼 흩어짐)이 되어버렸다아까의 장수가 다시 혼자 말을 달려오더니 돌아가는 길을 열어 주십사고 애걸하자엽은 웃으며 돌아갈 수 있게 허락해 주었다그리고는 기생을 불러 같이 노새를 타고 올 때처럼 돌아왔는데그 때까지도 하늘은 아직 밝지 않음이더라무릇 엽이 싸운 그 장수는 곧 오랑캐 장수인 누루하치였으며그 곳은 곧 그들이 무술을 연마하던 장소(연무장)였다.
 계해(1623)년 삼월에 인조(1595~1649,  和伯 松窓는 綾陽君선조의 손자이고 부는 定遠君(元宗으로 追尊,1580-1619), 어머니는 仁獻王后 具氏(1578~1626)이다)가 반정한 뒤엽이 등불 아래 홀로 앉아 칼을 어루만지며 탄식하고 있는데 창밖에서 기침 소리가 들렸다엽이 물었다. "누구냐" "아무개올시다." "무슨 일로 왔는고." "공은 장차 어떤 계책을 세우시렵니까." "나에겐 정해둔 계책이 없으니 어디 자네에게 물어봅세." "상책과 중책과 하책이 있으니 청컨대 이 중에서 택하십시오." "무엇이 상책인고." "군사를 일으켜 스스로를 방어하고 북으로 금나라와 내통하십시오그러면 임진강 서쪽은 조정의 국토에서 떨어져 나올 것이며또 아래로 위타( 趙氏,南越王으로 반역하여 皇帝 僭稱史記 南越列傳第五十三 참고)처럼 황제를 칭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이 중책인가.” "급히 병사 삼만 명을 동원하여 제가 그들을 거느리고 서울로 진격하게 하신다면 누가 이길지 알 수 없습니다." "하책은 무엇인고." "공은 대대로 나라의 녹을 받은 신하이니 순순히 나라의 명을 받드는 것이 가한 것입니다." 엽이 한참을 깊이 생각하다(沈吟)가 한숨을 쉬고 탄식하며 말했다. "나는 하책을 따르겠노라." 그러자 그는"그러면 저(중국말로 평민이 관리에 대하여 자기를 일컫는 말)는 이제부터 종적을 감추겠습니다."하고는 간 곳을 알지 못했다어떤 사람은 그가 용골대였다고도 말한다엽이 조정으로부터 사형의 명을 받을 적(後命귀양살이를 하는 罪人에게 死藥 내리는 일)온 조정에서 모두 그가 예사로운 사람이 아니라 하고 겁을 내어 감히 명을 집행하러 가려는 자가 없었다.
  구인후(1578~1658, 인조의 외종형仁獻王后 姑母)가 예전에 그의 막하에 있어보아 엽의 사람됨을 익히 알기에 자청하여 평안도로 내려갔다엽이 원수를 진 집안이 많아 그 사람들이 한꺼번에 칼을 들고 쳐들어오자,인후가 엄하게 그들을 막고서 시신을 관에 넣고 염을 하여 이송(治靷=發靷)하였다상여가 중화군에 이르자마침 인후가 御營大將으로 임명되어 먼저 서울로 돌아가게 되었다이 틈에 원수진 집안에서 쫓아와 관을 뻐개고 시체를 들어내어 마디마디 잘라버리고 가버렸으니이는 곧 천인의 연고임에서라엽이 소시 적에 운수를 점쳐보았더니천인을 죽여야 자신이 살 수 있다는 점괘가 나온 일이 있었다千人 바로 인후의 어릴 적 이름인데도 엽이 그 사실을 미처 모르고 애꿎은 사람을 무수히 죽여 천 명을 채우고자 했으니 어찌 그리 어리석었던가.
 엽이 죽음의 명을 받았을 때(賜死)힘센 자로 하여금 목에다 줄을 매어 잡아당기게 하고서 목숨이 끊어짐에,그 즉시 큰 길에서 行刑하는데이 때 창기들이 와서 구경하자 어떤 사람이 말했다. "너희들은 모두 감사가 사랑한 기생들인데죽는 것을 보고도 곡도 하지 않고 태연히 서서 구경만 하니 어인 일인가그러자 기생들은, "새로 온 사또(使道)에게 수청(守廳隨廳)들러 왔소."하고 서로 즐겁게 웃으며 가버렸다.

이원명이 지은『동야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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