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월 31일 월요일

율곡의 일화


1. 율곡과 가난
 
우리 역사상에 청빈한 관리[淸白吏]의 이야기가 많이 전하며, 또 그것을 하나의 미담으로 여기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율곡 선생은 워낙 도학으로 높은 위치를 점령한 어른이기 때문에, 그의 생활이 가난했던가 어땠던가 하는 것쯤은 그다지 중대하게 생각할 여지가 없는 문제다.
그래서 율곡의 생활이 가난했던 이야기는 일찍이 널리 알려진 이야기가 아니지만은 여러 가지 기록을 통해서 보면 그의 청빈했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가) 반찬 없는 밥
율곡이 대제학 벼슬을 사양하고, 잠깐 파주(坡州)로 물러나 있을 무렵이었다.
어느 날 율곡 선생 밑에서 부제학을 지낸 최황(崔滉)이란 이가 율곡을 방문하여 겸상을 차려서 밥을 먹는데, 반찬이 너무도 빈약하기 때문에 최황은 수저를 들고 머뭇거리기만 하다 말고 마침내 한마디했다.
『아무리 청빈하기로 이렇게 곤궁하게 지낼 수가 있습니까. 반찬도 없이 진지를 잡숫는대서야…… 소생이 민망하여 뵈올 수가 없습니다.』
이 말을 들은 율곡은 웃으며,
『나중에 해가 지고 난 뒤에 먹으면 맛이 있느니!』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우리 속담에 있는『시장이 반찬이지』하는 그대로였던 것이다.
<최준(崔濬) 지음>
 
(나) 쌀 선물을 받지 않음
율곡이 해주 석담에서 살 때였다. 언제나 점심에는 밥을 먹지 않았다. 양식이 모자라기 때문에 죽도 끓이지 못하는 때가 있었다. 이것을 안 재령(載寧) 군수가 선생에게 쌀을 보내드렸다. 더구나 그 군수는 최립(崔笠)이란 이로서, 율곡의 어릴 적 사귐이었다. 그러나 율곡은 그것을 받지 않았다.
자제들은 양식이 끊어졌던 차에 어디서 쌀 선물이 들어오므로 대단히 반가웠는데, 율곡은 두말도 없이 그것을 거절하는 것이다. 자제들이 이상히 여기며 물었다.
선생은 자제들을 향해서,『국법에 장물(臟物)을 주고받는 죄는 아주 엄격한 것이다. 우리나라 수령들이 나라 곡식 아닌 다음에야 따로 무슨 곡식이 있을 것이냐. 수령들이라 할지라도 제 개인의 곡식을 주는 다음에야 어찌 안받을 것이 있겠느냐마는, 이 최 군수는 제 것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응당 나라 곡식을 보내 주는 것일 테니 내가 어찌 그것을 받을 수 있겠느냐, 그대로 시장한 채 견디며 사는 것이지!』하는 것이었다.(율곡전서 권38, 잡록 중)
(다) 율곡과 대장간
율곡이 해주에서 살던 동안의 일이었다. 대장간을 차려 가지고 호미를 만들어 그것을 팔아서 양식을 사먹었다.
이것에 대해서 뒷날 백사 이항복(白沙 李恒福) 선생은 최유해(崔有海)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근세에 와서 모재 김안국(慕齋 金安國) 선생이 여주(驪州)에 물러나 있을 적에 친히 추수를 거두러 다니며, 마당에 한 알이라도 흘리지 못하게 하며, 이게 모두 하늘이 주시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율곡 선생도 해주에서 대장간을 일으켜서 호미를 만들어 팔아 그것으로 양식을 바꾸었던 것이니, 이같이 의에 해당한 일은 큰 인물도 그것을 부끄러이 여기지 않았던 것인가 생각합니다.』
 
(라) 쇠고기를 먹지 않음
율곡 선생은 평소에 쇠고기를 먹지 않았다. 그는 평소에,『국법에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람들이 소를 부려서 실컷 그 힘을 뽑아 먹고, 또 그 고기마저 씹는다는 것은 결코 어질다 할 수 없는 일이다』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마침 조정에서『쇠고기 못 먹게 금하는 법령』을 내리자, 율곡은 득의한 듯이,『국법으로까지 이같이 금하는 일이니 더욱 범해서는 안된다』하고, 그로부터는 비록 제사라 할지라도 쇠고기는 쓰지 아니했다. (율곡별집 권3)
 
(마) 집을 팔아 형제와 나눔
율곡은 자기만이 가난하게 산 것이 아니라, 모든 형제가 다 가난했던 모양이다. 물론 그 중에서도 율곡이 가장 나은 편일 것은 사실인데, 그나마도 처가 덕택을 상당히 보았던 것 같다.
장인 되는 노경린(盧慶麟)이 서울에 집 한 채를 사서 율곡에게 준 것이 있었는데, 율곡은 형제들이 모두 가난하게 살아 끼니를 못 이어가는 형편임을 보고, 자기가 그 집을 지니고 태연히 있을 수 없어 마침내 그 집을 팔아 가지고, 그 돈으로 베를 사서 골고루 분배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서울에 집 한채가 없었으며, 그러기 때문에 오히려 모든 형제가 먹건 굶건 같이 사는 수밖에 없었고, 때로는 죽도 끓이지 못하는 때가 있었다는 것이다. <조익(趙翼) 지음『포저집(浦渚集)』>
 
(바) 율곡의 별세와 가난
선생 같이 생전에 일국을 잡아 흔드는 높은 명성을 가진 큰 인물로서, 가정생활은 어찌 그리 궁색하게 지냈던 것인지. 그는 물론 나라를 위하는 생각 뿐이요, 집안 일에는 머리를 쓰지 않은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가난했던 가정 형편은 율곡이 별세하던 날 여실히 나타났다. 선생이 별세한 뒤에 당장, 집안에는 모아 놓은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고, 심지어 옷도 마련해 놓은 것이 없어 다른 이의 수의를 빌려 와서 염습을 했고, 또 그 뒤에는 처자들이 집이 없어 이리저리 이사 다녀 의지할 곳이 없었으며, 얼고 주림을 면할 길이 없는 것을 보고, 친구들과 유림의 선비들이 돈을 모아서 율곡의 처자들을 위하여 서울에 집 한 칸을 마련해 준 일이 있었다. <이정귀(李廷龜) 지음『율곡선생 시장(諡狀)』>
 
 
2. 율곡과 꿈
 
율곡에게는 처음 태어날 적부터 마지막 별세하는 때까지 꿈 이야기가 많이 전한다. 그야말로 하늘이 내신 위대한 인물이기 때문에 꿈으로써 징조를 먼저 보임이었던 지도 모른다.
 
(가) 율곡을 배던 때의 꿈
어머님 사임당이 율곡을 밸 적에, 꿈에 동해 바닷가에 이르렀더니 한 선녀가 있어 바다 속으로부터 살빛이 백옥같이 흰 옥동자 하나를 안고 나와 부인의 품에 안겨주는 것이었다.
이런 꿈을 꾸고 율곡을 배었다는 것인데, 그 때 율곡의 어머님이 어디서 살았는지는 자세하지 않으나, 지금껏 그 집안에서나 또 그 고장에서 전하기로는 강원도 평창(平昌) 고을 봉평면(蓬坪面) 백옥포리(白玉浦里)라는 곳에서 살았었고, 거기서 율곡을 배었다는 것이다.
 
(나) 율곡을 낳을 때의 꿈
율곡이 음력 12월 26일 새벽 인시(寅時 : 지금 오전 4시쯤)에 강릉(江陵) 북평(北坪) 외가 오죽헌(烏竹軒)에서 났는데, 낳는 날 밤에도 어머님 사임당의 꿈에 어디서 난데없는 검은 용이 동해 바다로부터 날아오더니, 사임당의 자는 방 처마 밑 문 머리에 서려 있는 것이었다.
그 꿈을 깨어나자 곧 율곡을 낳았으므로, 아기 이름을『현룡(見龍)』이라 불렀고, 또 그 방을『몽룡실(夢龍室 : 용꿈을 꾼 방) 』이라고 이름지었던 것이다. (율곡행장)
 
(다) 율곡의 어릴 때의 꿈
여기 율곡 자신이 어릴 적에 꾼 이상한 꿈이 있다.
율곡이 꿈에 하느님을 뵈었더니, 금 글자로 쓴 첩지 하나를 주는데, 열어보니 거기에는 이상한 시귀절이 적혀 있었다.
 
용은 새벽 동천(洞天)으로 돌아갔건만
구름은 오히려 젖어 있고
사향노루가 봄 산을 지나가니
풀이 저절로 향기롭다
[原詩] 龍歸曉洞雲猶濕 麝過春山草自香
 
율곡이 꿈에 얻은 이 시가 무엇을 말함인지 알 길이 없었는데, 뒷날 율곡이 세상을 떠나고 난 다음에야 모두들 그것이 바로 율곡을 가리킴이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용이 돌아간다』는 것이나『사향노루가 지나간다』는 것은 모두 다 율곡의 죽음을 이름이요, 또『구름이 젖었다』는 것이나『풀이 향기롭다』는 것들은 역시 율곡의 끼친 업적이나 명성을 이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율곡이 어려서 쓰던 벼루가 지금 강릉 오죽헌에 그대로 전하는데, 더구나 그 벼루 밑바닥에는 뒷날 정조(正祖) 대왕이 친히 노래를 짓고, 또 친히 글씨를 써서 새겨 놓은 것이 있거니와, 그 글귀 속에 옛날 율곡이 꿈에 얻은 시 구절을 인용하기까지 했음을 본다. (율곡별집 권5)
 
(라) 율곡이 별세할 때 부인의 꿈
큰 인물이 날 적에 꿈이 있었으니, 어찌 세상을 마지막 떠날 적에 꿈을 없을 것이랴. 율곡은 음력 정월 1월 16일 한창 추울 적에 세상을 떠났는데, 바로 그 전날 밤 부인 노씨의 꿈에 검은 용이 율곡의 침방에서 나와 하늘로 날아 올라가더라는 것이다. (율곡 연보)
 
 
3. 율곡의 인품과 성격
 
(가) 대사헌 율곡과 어떤 모녀
율곡의 46세 때의 일이었다.
6월에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이 되어 취임 첫 무렵에,『도헌(都憲:대사헌)이란 나라의 중요한 직임으로서, 기강을 세우고 풍속을 바로잡는데 그 책임이 있다』하고서, 옛글에 자기 의견을 보태어 풍속을 바로잡는 행동강령 50여 조를 써서 길거리에 내다 붙였다. 그래서 사람마다 모두 그것을 읽고 외우게 함으로써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서도 스스로 기강을 범하는 이가 없도록 하려 했던 것이다.
물론 그것의 대요로 말하면, 유교의 오륜 조항을 기조로 한 것이거니와, 다만 첫번 범한 사람에게는 가르쳐주고, 두 번째 범하는 사람에게는 명령하고, 세 번째 범하는 사람은 죄를 다스렸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즐겁게 복종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시민들이 서로 말하되,『이 어른이 부임한 뒤로는 모든 관청에서 부정한 일이 죄다 없어졌고, 또 길 갈 때에도 서로 모두 공경하며 인사들을 정중히 한다』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어떤 노파가 자기 딸이 불효하다고 고소한 일이 있었다. 이때, 율곡은 두 모녀를 한꺼번에 불러놓고,『나 같은 사람이 도헌이 되었기 때문에 풍속이 이같이 더러워졌나보다』하고, 인륜이 어떻게나 중한 것인가 예(例)를 들어 자세히 타이르자, 그들은 너무도 감격해서 같이 붙들고 울면서 서로 뉘우치고 돌아가 옛날같이 서로 사랑하는 모녀가 되었다. (율곡 연보)
 
(나) 율곡의 손님 접견
율곡이 이조판서로 있을 때의 이야기다.
일국의 재상, 명사, 선비, 심지어는 취직을 청하는 이들까지 겹쳐서 어떻게나 방문객이 많은지 식사를 제때에 하지 못하고, 어떤 때는 밤이 깊어서야 겨우 저녁밥을 먹는 경우가 많았다.
그것을 본 아우 옥산(玉山)이 형님의 건강을 걱정한 나머지, 사람 접견하는 것을 좀 줄이는 것이 좋겠다는 뜻을 말했다.
그 때 율곡은,『만일 손님 접견하는 것을 꺼리기로 본다면, 아예 저 석담(石潭) 같은 데 그대로 엎디어 살 일이지, 서울에 와서 벼슬할 필요가 뭐 있겠느냐. 내가 이제 이조판서로서 인물을 전형하는 자리에 앉았는데, 남을 만나보고 저울질한 다음에 라야 쓸 것이 아니냐. 이 자리는 손님 싫어하는 사람으로서는 안되는 자리야. 또 과거 보는 사람은 결국 벼슬 구하는 사람인데, 벼슬 구하는 사람을 안 만나 보기로 한다면 본시 아무도 안 만나야 될 것 아닌가. 내가 괴롭더라도 그 사람을 친히 만나보고 난 다음에 그 재주를 따라 각각 그 자리에 써야 할 것이니, 백명이 와도 다 만나봐야지. 이 일을 아니 맡았으면 모르되 맡은 바에야 천직으로 알고 소명을 다해야 되느니라』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인사청탁을 받으면 공정을 기하고 명명백백하게 처결하기 위해 그 사람들의 이름을 낱낱이 잡책에 적어 놓고 공개하는 것이었고, 혹시는 그 이름들을 창가에 써 붙여놓고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물으며 전형하기도 하는 것이었다. (율곡전서 권 38 부록)
 
(다) 율곡은 소곤거리는 일이 없었다.
홍귀상(洪龜祥), 홍치상(洪致祥) 형제는 율곡에게 친척도 되고, 문하생이기도 했다.
『우리 형제가 어려서부터 율곡 선생을 모시고 그 아래서 글을 배우고 자랐지만은, 평소에 한 번도 남과 소곤소곤 이야기하는 것을 본 일이 없다. 그리고 언제나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군자는 일에 처하고 마음가지는 것을 마땅히 저 청천백일같이 해서 누구나 환히 보고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셨던 만큼, 과연 표리가 같은 분이었다』는 것이다. (율곡별집 권4)
 
(라) 사람을 버리지 아니했다.
율곡의 서모 쪽에 따른 나이 어린 소년 하나가 집에 와서 늘 놀고 있었다. 그가 어느 날 율곡의 서재 안에 있는 무슨 귀중한 물건 하나를 훔쳐 간 일이 있었다.
그래서 율곡의 자제들이 그를 당장에 내쫓아 버리고 말았다. 한 열흘쯤 지나서다. 율곡이 그 소년을 다시 불러와서 옛날대로 대접해주는 것이었다. 자제들은『어째서 그 따위 도둑질하는 놈을 다시 불러들입니까?』하고 항의했다. 그때 율곡은,『그동안에 제 잘못을 회개했을 것이다. 사람을 영영 내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했다. 그 말을 들은 소년은 진심으로 감복했다. (율곡전서 권 38 부록)
 
(마) 글을 열 줄씩 읽던 율곡
율곡과 우계 성혼(牛溪 成渾)이 서로 대화한 말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다.
우계 :『나는 책을 읽을 때 여덟 줄쯤 한꺼번에 읽을 수가 있소』
율곡 :『나는 한꺼번에 겨우 여나무 줄밖에는 못 읽소』
 
(바) 샘물 근수
율곡이 금강산으로 들어가 스님들과 같이 오고 가며 불교를 연구해 보려던 때의 이야기다. 어느 날, 산 속 청렬한 샘물 가에서,『대개 맑은 물이란 근수가 무겁게 나가고, 궂은 물은 보기에는 흐리터분해서 무거워 보지만은 실상은 맑은 물보다 근수가 덜 나가는 거야』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때 그와 함께 다니며 그 이야기를 들었던 일학(一學)이란 스님이 뒷날 오대산(五臺山)에 있으면서, 자기 제자들에게 옛날 이야기 삼아 늘 그 이야기를 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실지로 실험해 본 결과 과연 그렇더라는 것이다. (잡기)
 
(사) 율곡과 풍랑
율곡이 어느 때 우계(牛溪)와 함께 화석정(花石亭) 아래서 배를 띄우고 선유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폭풍이 불어와서 배가 심히 요동하며 풍랑이 일어 뱃전을 치는데, 율곡은 태연히 앉아 시상에 잠겨 있는 양 했다.
우계는 몹시 겁을 내며 율곡을 향해서,
『어떻게 급한 때는 급한 대로 처변하는 방도를 써야 할 것 아니오』
하자, 율곡은 웃으며『우리 두사람이 어찌 물에 빠져 죽기야 하겠소』하는 것이었다. 얼마 있다가 풍랑도 잔잔해졌다. <윤선거(尹宣擧)의 노서기문(魯西記聞)>
 
(아) 율곡과 화석정
파주 임진강 가에 있는 화석정(花石亭)은 본시 율곡의 5대조가 세운 정자로서, 율곡이 일찍 8세 때에 이 정자에 올라 시를 짓기까지 한 정자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이 정자에 대해서는 임진란 적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율곡이 임진란이 일어나기 8년 전에 세상을 떠났지마는, 앞으로 그 같은 전쟁이 있어 임금이 장차 북으로 피난 갈 것까지를 미리 알았기 때문에 평소부터 이 정자에다가 밤낮 없이 기름을 먹여서 어떠한 폭우 속에서라도 훨훨 잘 타게 해 두었던 것이, 마침내 임진란을 만나 크게 효과를 보았다는 것이다.
난이 일어나자 4월 30일에 임금이 도성을 벗어나서 북으로 의주를 향해 갈 적에, 비는 쏟아지고 날은 어두워지자 임진강을 건널 길이 없던 차에, 율곡이 일직부터 이런 일이 있을 것을 알고 미리 화석정 기둥마다 기름을 먹여 두었기에 불을 질러 그 불빛으로 앞길을 찾아 첫날 밤 고생을 면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화석정이 그 때 그 때문에 불탄 것으로 되어 있고, 또 그만큼 율곡이 10년 뒤에 일이 어떻게 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것이 거의 일반의 상식처럼 되었고, 소설가들까지도 그렇게 써 놓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전혀 사실이 아닌 것을 알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지 않은 사실을 억지로 그렇게 만든대서 율곡이 더 훌륭해지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만큼 율곡을 예언자로까지 높이 받들려고 하는 후인들의 심리에서 만들어진 전설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인 즉, 그 당시 임금을 모시고 가던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이 그의 징비록(懲毖錄) 권1에 적어 놓은 기록에 이런 것이 있다.
『……나루를 건너 서니 이미 날이 어두워 앞을 분간하기 어렵다. 임진강 남쪽 기슭에 옛 승청(丞廳)이 있는데, 혹시 왜적이 거기 있는 재목을 가지고 뗏목을 매어 건너올까 해서 임금의 명령으로 불을 태우니 그 불빛이 강 북쪽에까지 비치어 길을 찾아갈 수가 있었다』(……旣渡 已向昏 不能辨色 臨津南麓 舊有丞廳 恐賊取材木 桴筏以濟 命焚之 火光照江北 得尋路而行) 그리고 또 선조 수정실록(권26), 재조번방지(권1) 등 여러 기록에도 똑같은 기사들이 적혀 있다. 그러므로 불을 태운 것은 화석정이 아니요, 나룻가에 있던 옛 승청이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실지 지형상으로도 동파(東坡)로 건너가는 임진강 나루터와 율곡리에 있는 화석정과는 서로 떨어져 있어 상관없는 곳이다.
다만 모든 인민들이 율곡을 그만큼 숭배했다는 증거가 되는 이야기일 뿐, 사실이 아닌 것임을 알아두는 것도 좋은 지식이 될 것이다.
 
(자) 율곡과 송구봉
율곡의 친구 중에 구봉 송익필(龜峰 宋翼弼)이란 이가 있었다. 그는 우리 역사상에서 이른바 지체가 낮은 사람이라 사회적으로 활약하지 못하긴 했으나 학문과 인격이 탁월하여 높은 칭찬을 받는 사람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한 분이었다.
서고청(徐孤靑)은 학자들에게,
『너희들이 만일 제갈량(諸葛亮)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려거든 송구봉을 보아라. 그가 바로 제갈량 같은 인물이니라』하였을 정도로 훌륭한 분이어서 율곡도 매양 그의 앞에서는 몸을 삼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율곡의『서자허통』에 대한 사상 때문에 구봉도 율곡을 뛰어난 혁명적 정신의 소유자라고 해서 무척 가깝게 친교했던 사이다.
어느 날, 송구봉이 율곡에게 혼인을 청했다. 율곡은 송구봉에게,
『벗은 옳거니와, 혼인은 어렵다』
하고 대답했다. 송구봉은 율곡에게서 혼인에 대하여 거절을 당하고서 탄식하되,『율곡도 역시 속인을 못 면했군!』하였다.
이것에 대해서 율곡으로서도 항상 인륜의 근본을 따져서 적자와 서자의 구별을 철폐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해 왔던 만큼 족히 실행할 수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은, 국법과 국속이 정식으로 고쳐지기 전에는 역시 어떤 혼란을 가져올 것을 생각하고 실행에까지는 옮기지 못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차) 율곡의 죽음과 도인들의 기도
율곡이 49세 되는 해 음력 정월 16일 새벽에 세상을 떠났는데, 바로 그 전 보름날 밤이었다.
서울에 어떤 선비가 강릉 지방으로 여행하는 길이었는데, 해는 어두워지고 길을 잘못 들어 산 속으로 들어섰는데, 어떤 나무꾼에게 길을 물었더니 이 언덕을 넘어가면 어떤 양반의 집이 하나 있으니 거기 가서 쉬고 가라는 것이었다.
선비는 나무꾼의 말대로 그 언덕을 넘어갔다. 과연 거기에는 집 한 채가 있었다. 그리고 다른 집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외딴 집이었다.
문을 두들겼더니 동자가 나와 맞는 것이었다. 동자는 선비와 문답한 뒤에 안으로 들어가더니 얼마 후에 도로 나와 선비를 들어오라고 했다.
선비가 안으로 들어갔더니 방에는 어떤 늙은이가 다 떨어진 의관을 바로잡으며,『오늘밤에 무슨 긴요한 일이 있어 여러 가지 서로 불편하기는 하지만은, 그렇다고 이 밤중에 어떻게 할 수도 없어 부득이 손님을 머무르게 할 수밖에 없소. 그런 줄 알고, 얼마 뒤에 이 방에서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손님은 입 한 번 떼지 말고 조용히 앉아 있기만 하시오.』하는 것이었다. 선비는 참으로 이상한 생각을 안 가질 수 없었다.
이윽고 어떤 스님 한 분과 또 다른 촌학구 한 분과 두 사람이 방문을 열고 들어서는 것이었다. 세사람이 만나 역시 서로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다만 주인이 동자를 시켜 정화수 맑은 물 한 그릇을 떠오게 하여 소반 위에 놓고 서로 둘러앉아 무엇인지 주문을 외우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아마 한 시간 동안이나 주문을 외우며 정성을 바친 뒤에 주인이 다시 동자를 밖으로 내어보내어 하늘에서 무슨 이상한 일이 있나 없나를 지켜보게 할 따름이었다.
이윽고 동자가 밖으로부터 들어오더니,『이제 막 동쪽에 있는 큰 별 하나가 빛을 내면서 땅으로 떨어졌습니다』하고 하늘에 이상이 있는 것을 보고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세 사람은 서로 놀라 탄식하며,『천수(天壽)가 다한 것을 어찌하는 방법이 없군!』하더니, 두 사람은 실색한 얼굴로 일어서 어디론지 가 버리고 주인도 슬픈 생각을 금치 못하는 것이었다. 손님은 비로소 주인에게 그 까닭을 물었다.
주인은 그제야 손님을 향해서『다른 것이 아니라, 서울에 계신 율곡 선생을 위해서 다만 몇 달 몇 해나마 수를 좀 연장시켜 보려고 경문을 읽고 기도를 올린 것이나, 별이 떨어지고야 말았으니 이 시각에 아마 서울에서는 율곡 선생이 세상을 떠나셨을 것이오』하는 것이었는데, 주인과 촌학구가 누구였던 지는 알 길이 없고, 다만 그 스님만은 금단대사(黔丹大師)이었던 것이다.
선비는 하룻밤 동안 참으로 이상한 집에서, 이상한 사람들을 만나 이상한 광경을 구경하고 서울로 돌아왔더니, 과연 그 날 16일 새벽에 율곡이 세상을 떠났던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원명(李源命) 지음『동야휘집(東野彙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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